요 며칠간 성가신 상상이 나를 에워쌌다. 한 중년의 생과 사에 대한 의혹에서 비롯된 이 상상이 나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또한 모순적인 나로 하여금 쓰라린 죄책감을 안겨주었으므로 몹시 강렬했다. 누렇게 변색된 카세트테이프 B면. 찢겨나간 라벨 위 흐릿한 볼펜 자국. 휘갈겨 쓴 ‘Ob-La-Di, Ob-L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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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의 후반을 향하는 청춘의 일원으로서 나 역시 앞날에 대한 불안을 곱씹고 번민하며 한 해를 보냈다. 그 대가로 두 손에 성장이라는 보상이 쥐어졌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성장의 지표는 수능시험과 같이 절대적인 수치로 점수화되어 우열을 가리지 않는 영역이니 말이다. 가진 것 없이 예체능을 한다는 건 말 그대로 책임감이 결여된 결심일까. 먹이사슬의 최하층을 향한 지름길인 동시에 고려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법한 불효일까. 나는 이 같은 의구심을 품고 낙천과 회의 사이를 오가며 허우적댔다. 하물며 이는 타인의 강요에 따른 결과가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다시금 부아가 치밀었다. 평범한 속인으로서 생을 마감하지 않겠다는 파렴치한 욕망이 낳은 결과인 것이다. 스스로 바닷물에 뛰어들고는 그 깊이와 냉랭한 수온에 놀란 나머지 엄한 이를 향해 화풀이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또한 호구지책에 기인한 번민의 중심에서 나날이 옹색함을 더해갔다. 자랑은 아니지만 머리부터 발끝을 온통 자격지심으로 무장했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데 있어 그야말로 보장된 자격을 부족함 없이 갖춘 셈이다. 자격을 갖춤과 동시에 나는 본의 아니게 주변의 모든 이들을 홀대했다. 몇몇의 지인은 필시 나의 홀대를 의식했을 터이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햇빛이 쉬이 들지 않는 북향집에 숨어 음침하고 습한 산소로 호흡했다. 어느새 마음 일부엔 곰팡이가 피었다. 적정량의 자외선과 바깥공기가 절실할 때면 잠시 현관을 나서곤 했다. 다만 붉은 벽돌로 지은 오래된 주택들이 사위를 빼곡히 에워싸고 있는 탓에 답답한 느낌은 매한가지였다. 이 주택들 사이 비좁은 틈새로 보이는 남산타워를 억지스럽게 내다보았다. 이렇다 할 이유 없이 웅장하게 서있는 것만으로 삶에 대한 권태를 별안간 상쇄해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효력은 늘 일시적이었다. 계절이 바뀔수록 더는 웅장해 보이지 않았으며 나와는 어떠한 접점도 없는 세계의 이질적인 조형물 같았다. 이쪽 현실의 나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태평한 세계처럼 느껴졌다. 종국에는 그저 하얗고 뾰족한 막대기로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산타워로서는 가만히 서있는 자신을 두고 이질적인 조형물 같다느니 막대기라느니 떠드는 한 인간이 그야말로 어처구니없을 것이다.
자기 파괴의 늪에서 때로는 침잠의 과정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즐기고 있음이 자각된 순간에는 스스로가 더없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급히 늪을 빠져나와 지면을 짚어야 한다는 자각이 재빨리 뇌리를 꿰찼다. 곧 다가올 신년의 일출을 온갖 구정물을 뒤집어쓴 채 맞이해서는 도리가 아니었다. 변덕스러운 나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귀향을 통한 환경의 변화를 꾀했다. 한적하며 햇빛이 쉬이 드는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면 꼬인 심사를 제법 고쳐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은 것이다. 환경에 변화를 주는 것이 과연 이에 적합한 처방으로 작용하느냐 하는 질문에는 답할 자신이 없다. 나는 이미 햇빛에 눈이 먼 맹인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야가 한껏 어두워진 나는 지팡이가 절박했으며 허공을 헤매는 손에 무엇이라도 닿는 즉시 서둘러 짚어야 했다. 동시에 이를 휘둘러 오염된 공기를 몰아냄으로써 우선 몸과 마음가짐을 청결히 해야 했다. 생계와 직업에 대한 청사진은 잠시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이 같은 과정에서 나는 소박한 공상을 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이른 봄날의 온화한 아침. 산뜻한 공기에 눈을 뜨면 고요한 집 안 구석 봄햇살이 정겹게 스며있다. 잎이 무성한 플라타너스 우듬지를 익살스럽게 헤집는 참새 무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창틀에 걸터앉은 고양이가 묘한 눈을 한 채 창문 너머로 들썩이는 우듬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잠에서 깬 내가 뒤척이자 고양이는 급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응시한다. 인간의 게으름을 꾸짖는 한심한 눈빛을 보내온다. 깨어나자마자 무언의 꾸중을 들은 나는 태연자약하게 개량한복을 걸치고 구수한 메밀차를 우려낸다. 이 틈에 비틀즈의 White Album을 턴테이블 위에 얹는다. 폴 매카트니가 흥겨운 연주에 맞추어 소련에 대해 노래한다. 다음 트랙으로 넘어갈 즈음 희뿌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고 단정히 앉는다. 모순적인 고양이는 어느새 무릎 위로 올라와 비몽사몽 졸고 있다. 찻잔을 훌쩍거리며 녀석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는다. 나와 녀석은 남향의 탁 트인 창문 너머로 한적한 아침을 관망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정신에 활기가 돌면 근처의 하천을 어슬렁 산보한다.’
주접이 따로 없다. 다만 그다지 비현실적인 주접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파리 시내의 에펠탑이 코 앞에 보이는 아파트를 꿈꾸는 등의 뻔뻔함은 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실없는 공상에 그칠지 혹은 이 중 일부라도 현실에 반영될지는 미지수다. 얼마 전 나는 지방의 본가에 머무르며 며칠간 발품을 팔았다. 그 결과 나름 만족스러운 구조의 단칸방을 계약할 수 있었다. 열 평 남짓의 비좁은 방이지만 소박한 청년이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 풍성한 햇빛 외에는 대수가 아니었다. 하물며 이 방은 정남향으로 공상 실현의 밑그림이 완성된 셈이다. 나는 계약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보름 남짓 남은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 중년을 떠올렸다. 트럭을 소유하고 있는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필시 괘씸한 아들 녀석의 이사를 도와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