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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나는 테이프를 손에 쥔 채 다시금 먼 과거로 침잠했다. 아마도 내가 보통의 아이들과 같이 유치원에 다녀야 했을 시기로 기억한다. 네 식구는 구의동의 한적한 언덕길 위 열다섯 평 남짓의 자그마한 빌라에 지냈다. 나는 당시로써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울보였다. 가족 중 누구라도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 즉시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해온 모양이다. 이윽고 나는 이때다 싶어 눈물샘을 터뜨린 것이다. 온몸의 수분을 두 눈으로 남김없이 쥐어 짜내는 데에 혈안이 된다. 스스로의 불안을 온 세상에 아뢸 목적으로 맹렬히 울어댔다. 그리하여 나는 유치원이라는 공간이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가득할 뿐 아니라, 어린 내 머릿속에는 그 무엇보다 익숙하며 최초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가족이 사라진 섬뜩한 곳이라고만 여겼던 것이다. 섬뜩한 유치원 또한 전례없이 울어대는 내게 극구 손사래를 쳤다.
당시 그녀는 근처의 작은 수선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재봉틀을 밟았는데, 이따금 하는 수 없이 이런 나를 등에 업고 출근했다.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든 채 비좁은 수선집에 들어서면 열심히 페달을 밟던 여성 서너 명이 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줄곧 구석에 앉아 요란한 소음을 뚫고 그녀를 향해 울어댔다. 그러면 그녀의 동료들은 다소 정도가 지나친 나를 황급히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들의 눈에 지독하게 울어대는 내가 귀엽게만 비친 것도 하루 이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역시 알 길이 없다. 다만 하얀 다마스를 타고 전국을 밤낮으로 누볐던 것만은 분명하다. 유치원에 이어 수선집 역시 인내를 다한 끝에 나를 더 이상 반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종종 나는 노후를 평안히 보내야 마땅할 노부부가 사는 옆집에 맡겨지기도 했다. 그들의 귀중한 수명을 단축시키는 데에 내가 크게 기여한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초등학생이었던 형은 고학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전처럼 일찍이 돌아와 어린 동생을 보살필 수 없었다.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던 부부에게 나는 비협조적인 늦둥이었다. 분리불안이라는 점에 있어 과히 독보적이라 평할 수 있던 나를 두고 두 남녀는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돌연 내게 갖가지 옷을 입혔다. 털모자며 내복 따위로 겹겹이 싸맨 나를 데리고 다마스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향했다. 정수리가 바퀴를 간신히 웃돌만큼 왜소한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차에 오르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조수석에 앉히고는 안전벨트를 채웠다. 나를 유치원에 보내는 대신 낯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결심한 것이다.
마흔을 갓 넘긴 당시의 그는 비교적 활력이 돌았던 모양이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아빠 여기가 어디야?” 하는 물음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곳의 지명을 또박한 발음으로 몇 번이고 일러주었다. 자신이 더 늙기 전에 늦둥이의 눈과 귀에 세상의 다양한 색과 소리를 담아줄 목적이었다. 다만 나의 부실한 기억력이 그의 수고를 무색케 했다는 점이 송구스럽다. 또한 인식이 발달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온통 먼 산의 중턱이며 달리는 차들의 뒤꽁무니, 가드레일 따위가 전부였기 때문에, 동일한 장소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뱅뱅 돌고만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번번이 그는 공장 혹은 창고 같은 거대한 컨테이너 건물만 달랑 세워진 벌판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시동을 끈 뒤 금방 올 테니 얌전히 있으라며 내게 신신당부를 해두고 밖을 나섰다. 트렁크로 다가가더니 정체 모를 상자를 꺼내 카트에 싣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겁 많은 아들놈이 그새를 못 참고 차 안에서 통곡하고 있을 거란 걱정에 노심초사한 건지, 또는 긴 수고가 들지 않는 자질구레한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매번 서둘러 돌아왔다. 빈 카트를 끌고 흙 묻은 구둣발을 빠르게 옮겨와 나를 살폈다. 차에 올라탄 그는 돈이라도 벌어왔는지 늘 내게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느냐며 묻곤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하루 두세 곳 가량을 돌았다. 거대한 컨테이너에 무얼 배달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길이 없다. 다만 내가 아는 한 그는 남부럽게 살지는 못할지언정 도의를 거스를만한 배짱은 없었다. 이 같은 성정으로 미루어보아 마약이나 폭발물 따위의 불온한 물건은 아니었을 거라 믿고 싶다. 그가 당일의 마지막 몫을 끝내면 주로 환한 달이 산 중턱에 걸친 저녁 어스름이었다. 먼 지방의 시골동네를 쏘다녔던 터라 서울로 돌아가기엔 자주 어려움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벌판에 차를 세우고 시트를 젖힌 뒤 노숙 아닌 노숙을 했다. 햇병아리인 나는 당시의 노숙이 꽤나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는 늘 어둠을 뚫고 근처의 구멍가게를 찾아 간식을 사오곤 했다. 나는 그가 쥐고 온 검정 봉투에서 익숙한 과자가 보이면 해맑게 웃었다.
트렁크 한 켠에는 늘 예의 천체망원경과 통기타 그리고 우주에 관한 서적이 차지했다. 글로브 박스 안은 팝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로 가득했다. 청명한 하늘에 별빛이 또렷하게 수 놓인 밤이면 그는 필시 커다란 망원경을 끄집어냈다. 나는 벌판 한가운데 삼각대를 조심스럽게 설치하는 그를 창문 너머로 지켜보았다. 이론으로는 성미가 차지 않던 그는 두 눈으로 밤하늘을 몸소 음미하는 행위를 모종의 향락으로 삼았다. 어느 때보다 열의를 띤 그는 한쪽 눈을 찡그린 채 대포 같은 망원경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는 내게 손짓했다. 눈에 보이는 노란 점이 별인지도 달인지도 분간이 안 되는 코흘리개를 상대로 베텔게우스가 어쨌거니, 오리온자리가 저쨌거니, 하며 우주의 이치를 주입시키려 했다. 내게는 그와 같이 우주라는 무한하며 끝없는 공간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다. 다만 실존하는 별을, 동화책이 아닌 벌판 위에 그려 즉각적인 사실의 형태로 내 눈에 기록해준 그에게 필연적인 존경을 품은 것이다.
그가 일을 마친 장소가 바다와 밀접해 있으면 그날의 노숙 장소는 어김없이 방파제 앞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이따금 달빛 서린 파도가 방파제에 부서졌다. 그는 글로브 박스를 열고 카세트테이프를 한 움큼 끄집어내 무작위로 틀었다. 창밖으로 거센 물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정체 모를 팝송이 고요한 차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국어인지 뭔지 모를 요령부득인 언어로 무슨 말을 신나게 떠드는지는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었다. 다만 흥겨웠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들이 비틀즈나 카펜터스, 척 맨지오니, 밥 딜런 등과 같은 위대한 작자들이었음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유독 비틀즈의 ‘Ob-La-Di, Ob-La-Da’를 광적이다시피 좋아했다. 질리지도 않고 몇 번씩 틀어달라며 그를 졸라댔다. 그러면 그는 익살스러운 표정이며 추임새를 넣어 나를 더욱 들썩이게 했다. 훗날 나는 이 곡을 들으면 필시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세속에서 찰나의 평온을 좇던 중년과 코흘리개는 어둑한 수평선을 앞에 두고 오리온자리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와 엮인 과거를 반추할 때면 곧잘 당시의 인상을 떠올렸다. 이는 기어이 먹구름을 비집고 악착같이 빛나는 태양과 같았다. 또한 그에게만큼은 결코 객관적이며 냉철한 잣대를 들이밀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게 하는 견고한 재갈로써 내 입과 심장을 옥죄었다. 나는 그에 대한 그녀의 경멸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모른 체하고 싶은 고집도 일었다. 그가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기에 앞서 그녀를 들여보았다면, 하고 생각했다. 팝송 대신 그녀의 메마른 한숨을 주의깊게 들었다면, 하고도 생각했다. 그의 숭고한 향락이 그녀에게는 현실에 어떤 달콤함도 안겨주지 않는 악취미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곁에 서서 그를 향해 삿대질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