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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Jan 01. 2020

카세트테이프 B면 6


6


끝내 나는 목표해둔 돈을 모아 상경을 감행했다. 그가 떠난 뒤로 거진  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지만 그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훗날 온갖 자격지심으로 무장하리란 예상은 추호도 없던 당시의 나는, 걸핏하면 서울과 희망이라는  단어를 동일시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나는 문득 터미널로 향하기 전에 그를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가족을 떠난 뒤에도 내게는 이따금 안부를 물어왔기 때문에 나는 그의 거처를 쉬이   있었다. 걸어서 십오 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임을 알았을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다만 나는 그간   번도 그를 찾지 않고 있었다. 속히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먹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간혹 그의 근황에 호기심이 일어지만 그때 뿐이었다. 허무하리 만큼 밀접한 거리가 나를 안일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그에게 불상사라도 닥치면 곧장 뛰어가 도울  있는 거리였다. 또한 명절과 같이 뜻깊은 날에는 어슬렁 다녀올 수도 있었다. 다만 무사태평했던 나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불과 십오  거리에서 그의 육체와 정신이 녹슬어가고 있음을 일절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무지한 나는 터질 듯한 배낭을 메고 그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제법 최근에 지어졌는지 깔끔한 빌라가 좁은 골목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늦봄 정오의 온화한 햇살이 골목 전체에 스며 있었다. 빌라 맞은편에는 예의 낯선 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바퀴며 차체 할 것 없이 온통 진흙 투성이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렸다. 무거운 배낭에 밀착된 등허리가 어느새 땀에 젖었다. 그러자 현관문 너머로 힘없는 발걸음이 바닥을 쓸면서 다가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죄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의 몰골이 불과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일체 생기를 잃고 수척해져 있었다. 몰라볼 정도로 야윈 그의 얼굴이며 팔다리를 바삐 살핀 나는 그에게 반가움을 표하기도 겸연쩍었다. 무기력과 패배감이 뒤섞인 익숙한 냄새가 열린 문 틈새를 비집고 풍겨 왔다. 그에게는 무례한 말이지만 향보다는 필시 냄새라는 단어가 적합했다. 중년 특유의 갑갑하며, 얼마간은 바깥공기가 닿지 않은 듯한 냄새가 비좁은 단칸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전히 막걸리병이 나뒹구는 가운데 족히 며칠은 방치된 그릇들이 싱크대에 쌓여 있었다. 태평하게 찾아간 나는 돌연 마음이 불쾌해졌다. 그간의 안일한 태도를 자책했다. 동시에 이 같은 상태로 지내고 있는 그에게 배신감을 품었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던 나는 그에게 점심은 챙겨 먹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기는 이미 먹었다, 너는 챙겨 먹고 왔느냐, 버스 안에서 배고프지 않겠느냐, 하며 황급히 되물었다. 내게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조며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 보였다. 나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함께 지낼 당시 즐겨 찾던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예리한 혈연을 애써 말리려 들지 않았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집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트럭에 실려 사라진 물건들이 과거의 모습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전날의 밤하늘을 살폈는지 창가 옆으로는 망원경이 놓여 있었다. 먼지로 잔뜩 뒤덮인 턴테이블과 거대한 오디오는 여전히 한 쌍인 채로 붙어 있었다. 새까만 흙으로 가득 찬 서너 개의 스티로폼 상자가 밝은 양지쪽을 나란히 메우고 있었다. 상자 안으로는 정체 모를 푸른 식물이 자랐다. 그 주변에 흙모래가 나뒹구는데도 무신경한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이 모든 것이 열 평도 채 되지 않는 좁다란 공간을 어수선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가 발 뻗고 잘 공간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눈에 그는 돌연 산속에 숨어 스스로의 온전한 의지로 세속을 떠난 속인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속되지 않은 삶을 마지못해 당면한 죄수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막 배달된 음식을 작은 식탁에 펼쳐 놓고 마주 앉았다. 오월 낮의 눈부신 빛줄기가 망원경이 놓인 창가를 통해 그와 나 사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이따금 환한 햇빛에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그날따라 유독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힘겨웠던 나는 여러 가지 물음을 궁리한 끝에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는 필시 형편이 넉넉지 못할 터였다. 나는 그가 매달 집세를 무슨 수로 충당할지 의문이 앞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그는 사소한 일자리를 구했으니 당분간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나는 잠시 안도했다. 그러나 동시에 근심이 스쳐 어떤 일자리인지 재차 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트럭을 몰고 공장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폐기물을 나르는 일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다시금 나는 공장에서 나오는 폐기물이면 무겁고 위험할 텐데, 몸에는 지장이 없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평일에만 짧게 하는 일이라 지장이 없다는 대답으로 내 근심을 일단락 지으려 했다. 나는 그가 내게 기대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빛줄기 사이로 그의 주변을 떠다니던 먼지가 또렷하게 보였다.


각자의 앞에 놓인 자장면은 줄지 않고 굳어갔다. 나는 가끔 청주에 오면 들르겠다는 말을 끝으로 그의 단칸방을 나섰다. 바깥공기가 더없이 청정하게 느껴졌다. 버스에 오른 나는 마음이 거북했다. 상경한 이후에도 나는 줄곧 그를 떠올렸다. 하루에 과연 몇 마디나 할까. 세상의 자극과 사람의 손길도 닿지 않을 텐데. 얼굴 근육이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할 텐데. 끼니를 제때 챙겨 먹을 의지는 있는지, 여전히 불쾌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건 아닌지, 설이나 추석이면 명절 내음조차 맡지 못할 그가 안쓰러웠다. 호기심보다는 늘 연민이 앞섰다. 그 후로 나는 또 한 번 그를 찾았다. 그는 남은 삶에서의 모든 유희와 쾌락이 자신에게는 더 이상 무의미하며, 이들을 좇으려는 의지와 희망을 상실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외에 달라진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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