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의 꼼수
작년 1월 말, 한국행 항공 티켓을 예약해 놓았다. 출발일은 4월 16일 밤 11시. 난 비행 중 수면이 불가능해서 되도록이면 밤 비행기(red eye flight)를 탄다. 그러면 단 한두 시간이라도 잠시 눈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출발 당일까지 출근해 일할 수 있고, 아침 일찍 도착지에 떨어져 하루를 잘 활용할 수 있어서 좋다.
티켓을 예약하기 전, 매니저에게 휴가를 요청해 5월 4일 출근하는 것으로 미리 승인을 받아놨다. 천 달러 넘는 비행기 값 들여 장거리 여행하는 김에, 대만에 나흘 머물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하고, 나머지 기간은 한국에서 보낸 후 5월 3일 항공편으로 돌아오는 그런 일정이었다. 직장 동료 중 대만 출신 여자가 있어서 대만 여행에 대한 여러 가지 조언을 받았다. 항공권은 미리미리 사두는 게 저렴하지만, 호텔 예약은 미리 해놓는 것보다 닥쳐서 하는 게 더 싼 요금을 적용받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뤄두고 있었다.
그런데 티켓 부킹하고 나서 한 일주일쯤 후, 한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터졌다. 한국 뉴스는 미국에까지 빠른 속도로 전달돼 직장 동료들이 너 한국 가도 되겠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대구와 서울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애들한테 감염자 대부분은 대구에 있고, 난 서울로 간다고 알려줬다.
당시만 해도 출발일이 두 달 넘게 남아 있어서 일단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당시 확진자들은 대구 및 경북지역에 국한돼 있어서 난 굳이 여행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내 티켓은 저렴한 대신 환불 불가(non-refundable) 조항이 있어서 취소하게 되면 전액 환불이 불가능한 걸 알았기 때문에 쉽사리 여행을 취소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미국 연방정부가 중국 여행 금지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한국 여행에 대한 제한을 할지도 모르고, 귀국 후 이주 자가격리 때문에 출근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가 좀 우려가 됐을 뿐이다.
이윽고 3월이 되자 코로나바이러스는 미국에까지 퍼졌고, 항공사가 국제 비행 편을 취소한다는 뉴스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3월 중순, 엘에이에서 대만을 거쳐 한국에 가는 내 비행 노선의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이메일을 읽어보니, 타이페이이에서 인천으로 가는 항공편 시간이 바뀐 거였다. 내심 호텔 예약 안 하길 잘했구나 이러고 있는데, 다시 일주일 후 노선 자체가 취소됐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좌석을 다 채우지 못하고 비행기를 띄울 바엔 그냥 안 띄우는 게 손실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인 듯했다.
일단 아시아나 콜 센터에 전화를 해봤는데, 계속 통화 대기 중이고,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 말고 비행 편 취소된 사람들이 수 천 명일 테니 전화통이 불나는 게 당연했다. 몇 번 시도하다 이번엔 티켓을 구매한 여행사인 오비츠(Orbitz)에 전화했는데,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전화량이 폭주해 삼일 내에 출발하지 않는 고객의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멘트를 틀어놓고, 아예 전화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 항공권이 취소되고 나서 일주일 후 어느 날 아침 7시쯤 아시아나 콜센터에 전화를 했다. 아침 일찍부터 전화해서 그런지 사람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내 예약번호를 주고, 직원에게 환불을 요청했다. 직원은 내 티켓의 경우 발권사(내 경우는 오비츠)를 통해 환불신청을 해야 하며, 출발 당일 일주일 전까지 요청하지 않으면 수수료 백오십 달러 정도 붙는다고 알려줬다. 문제는 발권사인 오비츠가 통 전화를 받지 않으니 출발 당일 일주일 전까지 요청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 같다니까, 친절한 아시아나 직원은 이미 환불 요청을 해 놓은 것으로 표시해 놓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부분 고객들은 아시아나 티켓을 아시아나가 왜 당장 환불을 해주지 않냐고 역정을 내시는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시아나 직원과 통화한 지 삼주 정도 지난 후, 이번엔 오비츠 앱을 통해 가상 직원(Virtual Rep)과 채트(chat)를 시도했다. 예약번호를 넣으니까, 여행일까지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진짜 직원(사람) 연결은 안 되고, 출발 삼일 전에 다시 시도해 보라고 했다. 결국 또다시 삼 일을 기다렸다가 앱을 통해 채트를 시도했고, 이번엔 직원이 다른 고객을 도와주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대기시간 20분이 30분이 됐고, 드디어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다. 오비츠 앱을 통해 나와 채트를 시작한 사람은 카타리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내 itinerary를 알려주고 나서 시스템에서 찾는데만 십 분 이상이 걸렸다. 늘어난 통화량 때문에 급 고용된 초짜 같다는 느낌이 다분히 들었다. 난 항공권이 취소됐기 때문에 환불을 요청한다고 말했고, 그녀는 환불 처리를 한다면서 이십 분 넘게 통화대기 상태로 나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클릭 하나면 항공권 풀 크레딧 받을 수 있다는 문자를 받았다. 난 이게 뭔가 싶어 직원한테 이거 네가 보낸 거냐고 물어봤지만,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난 카타리나가 환불 신청을 제대로 완료한 건지 의문이 들어, 이번엔 오비츠 콜센터에 전화를 했다. 전화해서 내 예약번호를 넣으니까 항공권이 취소됐고, 환불처리 진행 중이라는 멘트만 나오고, 직원이랑 통화할 수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난 풀 크레딧 줄테니까 여기 클릭하라는 이메일을 다시 받았다. 나는 이게 뭔가 싶었지만, 클릭하지 않았다. 며칠 지나 은행 앱을 통해 확인해보니, 드디어 내 신용카드 계좌로 항공운임료 전액이 들어와 있었다.
작년 3월 말, 미국 의회가 통과한 코로나바이러스 구제 기금안(CARES Act)은 여행사와 항공산업에 오 백억 달러를 긴급 수혈해줬다. 직원 월급도 줘야 하고, 취소된 항공권 환불해 주려면 현금이 필요해서 나온 대책이다. 그런데 항공사들이 취소된 항공권을 환불해 주기보다는, 고객들을 오도해 크레딧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상원 청문회 도중 드러났다고 CNN은 보도했다. 항공사들이 환불 대신 크레딧(credit)을 주면 고객에게 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팬데믹 전, 경제 호황과 해외여행의 활성화로 항공사와 여행사는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 그동안의 수익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보도에 따르면, 그동안 항공사들이 넘쳐나는 현금으로 시설 재투자하기보다는 자사 주식을 사들여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걸로 드러났다. 의회에서 구제 기금에 대해 논의할 당시, 민주당 의원들은 항공사들이 구제 기금을 받아 자사 주식을 사들여 주가를 떠받치는 일이 없도록 감시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직원 월급 주고, 항공권 환불해주고, 계속 비행기 운항하라고 거액의 세금으로 보조해 주는 거지, 주가 유지하라고 주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난 풀 크레딧을 줄 거라는 여행사의 솔깃한 제안에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 티켓 전액을 환불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의 자율성에 모든 걸 맡기기엔 기업의 이(利)에 대한 유혹이 너무 큰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