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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 김홍재 Oct 22. 2020

반쪽 말고, 진짜 비행

반쪽 말고, 진짜 비행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은 신기한 비행이 생겼다. 출장과 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많이 타는 편이지만,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은 비행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다. 팬데믹 상황이 길어지고 있는 2020년 어느 날, 타이완 공항을 출발해서 제주도 상공을 20분 동안 비행한 뒤에 다시 타이완으로 돌아가는 비행 상품이 출시되자마자 4분 만에 완판 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호주의 항공사는 시드니를 출발해 7시간 동안 호주 여러 여행지의 상공을 비행하기만 하고 다시 시드니로 돌아오는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팬데믹 초반에 우리 항공사 중에도 김해 공항을 이륙해 다시 김해 공항으로 돌아오는 비행 편을 운항하기도 했고, 팬데믹이 1년을 넘기는 시점에 이르러 인천공항을 이륙해 동해안을 따라 비행한 뒤 부산과 제주도 상공을 거쳐 출발지로 돌아오는 2시간 30분의 비행을 판매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비행기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기내식을 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비행기 여행이 고픈 우리를 위해서 항공사에서는 이런 가상 여행 상품을 만들었고, 기내식을 편의점 도시락처럼 사 먹을 수 있게 했다.


비행기 여행은 참을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해도 이렇게라도 비행기를 타는 경험을 만들어야 할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팬데믹이 오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팬데믹에는 이렇게 해서라도 비행하는 느낌을 경험해 보려고 한다.


편의점에 등장한 기내식 도시락



해외로 출장을 다니며 비행기는 즐거움보다 부담으로 기억되는 일이기는 해도, 팬데믹 상황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으니 이런 비행 상품과 편의점 기내식 도시락에 호기심이 생기는 요즘이다. 해외 출장을 위해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할 때는 발걸음이 무거운 날이 있었다. 정장 구두를 신고 넓은 공항을 오래 걸을 때는 남자들도 발이 아프기도 하고, 급할 때는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탑승구까지 숨이 차도록 뛰어서 겨우 비행기에 탑승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랬던 공항이 지금은 그립다. 너무 그립다.


비행기도 그립고, 공항도 그립지만, 3시간 정도의 적당한 비행으로 다녀오곤 했던 홍콩으로 떠난 한 달 파견 근무가 가장 그립다. 커리어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30대 중반에 출장으로 자주 오가던 홍콩에서, 한 달 동안 파견 근무할 기회가 있었다. ‘한 달 살기’ 여행이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 ‘한 달 살기’ 휴가나 여행을 꿈꾸었지만, 아직 제대로 된 ‘한 달 살기’ 휴가 여행을 해 본 적은 없다. 대신, 홍콩 지점에서 한 달 파견 근무는 3시간 정도의 비행이라 시차 적응과 같은 부담도 없고,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일을 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일정도 빡빡하지 않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 달 살기와 홍콩 파견 근무


해외 파견 근무는 외교관을 꿈꾸었던 취준생의 꿈이었고, 그 꿈을 이룬 후에는 커리어에 있어서 소중한 순간으로 기억에 남을 일이 되었다. 홍콩으로 한 달 파견근무를 가기 전에 ‘워크 퍼밋(work permit)’을 받았다. 우리나라 여권으로 많은 나라에서 무비자로 60일, 또는 90일 체류가 가능하지만, 그보다 짧은 한 달이라도 파견 근무가 되면 ‘워크 퍼밋’이라고 부르는 취업 비자를 받아야 한다. 해외 근무지에서 일을 하고 대가(소득)를 받거나, 보험 적용을 받으려면 ‘워크 퍼밋’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비자를 받아두면 좋은 점도 있다. 비자가 유효한 기간에 홍콩에서 서울을 다녀가거나, 타이완으로 출장을 갔다가 홍콩에 재입국할 때, 입국심사장(passport control)에서 여행객들로 넘치는 복잡한 외국인용 대기줄이 아니라, 덜 붐비는 홍콩 내국인용 줄을 서도 되고, 비즈니스를 위해 홍콩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한 빠른 입국 심사를 받을 수 있다.


당시 근무했던 유럽계 회사의 홍콩 지점은 홍콩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빌딩의 고층부 60층에 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근처의 레지던스에서 일어나 출근하고, 60층 사무실의 라운지에서 홍콩 항구의 풍경을 보면서 커피를 마신 후, 오늘 일할 자리를 잡아야 한다. 요즘은 국내에서도 정해진 자리가 없는 사무실 환경이 생겨나고 있지만, 홍콩과 싱가포르에 있는 외국 기업들은 이미 5년 전쯤부터 앞서 도입하고 있던 방식이다. 혼자 오랜 시간 집중해서 일을 해야 하는 날은 구석의 조용한 자리를 잡으면 되고, 상사가 잘 보이지 않는 자리를 일찍 선점할 수도 있다.


보통 이런 오피스 환경을 만들 때, 직원이 100명이라면 80개 정도의 워크스테이션(=1인용 업무공간)을 만들기 때문에, 사무실 임대와 유지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휴가나 출장 중인 직원과 재택 근무자들이 항상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100명의 직원이라도 80개 정도의 워크스테이션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과 오피스 임대료가 비싼 홍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런 방식으로 오피스를 임차하기도 한다. 팬데믹을 겪는 지금, 발전한 IT 기술과 맞추어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무실 환경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레지던스 창 밖의 홍콩 야경과 60층 사무실의 뷰


60층 사무실에서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면, 홍콩에서 맛집이 많은 소호나 란콰이퐁에서 친구를 만나거나, 서울에서 전화나 이메일로 일하기만 했을 뿐 만나본 적이 없었던 홍콩의 거래처 직원을 만나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레지던스에 돌아와 침실에서 홍콩의 야경을 보다가 암막 커튼을 닫는 버튼을 누른 후에 잠들었고, 이렇게 출퇴근이 한 달 동안 반복되었다.


홍콩으로 파견 근무를 온 이유는 홍콩 지점에 일하는 우리 팀 동료가 건강을 이유로 요즘 들어 주목을 받고 있는 FIRE(Financially Independent Retire Early)족처럼 이른 은퇴를 선택했는데, 그 동료를 대체할 후임자를 채용할 때까지 대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급한 상황에 서울에서 홍콩으로 ‘땜빵’을 온 것이다. 그렇게 홍콩 근무를 하게 되었다.


홍콩 지점에서 맡은 일은 지진의 위험이 높은 타이완 비즈니스였다. 타이완은 우리나라처럼 반도체 관련한 산업이 발달한 곳인데, 타이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진 보험 상품의 가격을 정하고 재보험(Re-insurance)이라는 금융 상품으로 타이완의 보험회사와 브로커에게 팔아야 하는 일이다.


지진의 위험이 낮은 서울에서 일할 때는 지진 보험 상품을 만들 때 복잡한 계산을 할 필요가 없었고, 지진 보험을 깊이 있게 다루어 볼 기회도 없었다. 우리나라에도 태풍이 불긴 하지만, 홍콩 지점에서 일하면서 다루어본 홍콩, 마카오, 괌의 강력한 태풍 위험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태풍 위험은 비교적 낮은 편이어서 자연재해 보험료도 저렴한 편이었다. 타이완은 강력한 지진과 태풍 때문에 자연재해 보험 상품이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그중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는 태풍, 지진, 홍수 위험에 모두 노출되어 있는 필리핀과 일본 마켓이다.


홍콩 지점에서 지진 위험이 높은 타이완 마켓의 지진 보험료를 산정하고 거래하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기는 했지만, 커리어에 지진 보험에 대한 전문성을 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홍콩에 파견 근무하면서 타이완의 지진 보험 상품을 다루어 본 경험은 몇 달 뒤에 도쿄 지점에서 파견 근무를 할 때, 가장 심각하고 복잡한 도쿄 마켓의 지진 보험 상품을 다루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커리어에 있어서 큰 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던 홍콩 파견 근무였다.


첫 주말에는 생각보다 추웠던 1월의 홍콩 날씨 때문에 쇼핑몰에서 따뜻한 옷을 쇼핑하면서, 홍콩의 색다른 물건을 구입해 두기도 했다. 다른 주말에는 친구 집을 방문하거나, 골동품 시장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바다와 산이 있는 홍콩섬에서 트래킹을 하기도 했다. 회사 레지던스 숙소는 번화가 란콰이퐁에서 1분 거리에 있는 곳이라, 30대 출장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파견 근무를 위한 상황이었다. 팬데믹 상황인 지금 그리운 공항과 비행기를 떠올리다 보면, 즐겁게 일했던 홍콩에서의 기억이 종종 떠오른다.


팬데믹이 끝나면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할 이유


공항과 비행이 그리우면, 타이완이나 호주의 항공사처럼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은 비행을 판매하는 우리나라 항공사의 반쪽짜리 비행티켓을 사게 될 수도 있지만, 그런 비행으로 한 달 살이 파견 근무와 여행을 온전하게 대체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업무는 온라인 영상 회의로 대체할 수 있어도, 홍콩의 금융가에서 사람들을 만나 네트워킹하던 경험까지 대체할 수는 없다.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에 내리지 못하고 출발지로 돌아온다면 해외 근무를 통해 커리어에 있어서 내공을 쌓을 수 있는 기회도, 여행을 통해 재충전하는 기회도 가질 수가 없다. 잠깐 동안 그리움과 비행기 상사병만 달래줄 뿐이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의 공항에 내려 다양한 경험으로 커리어를 쌓고, 휴가를 떠나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반쪽 짜리 비행 말고 진짜 비행이 그리운 시간이다. 편의점 말고 진짜 기내식을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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