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bin 김홍재 Oct 16. 2020

블루 바를 커피와 지독한 젯랙

Jet lag

여기는 ‘블루 보틀’ 커피가 탄생한 미국인데, ‘블루 보틀’ 커피는 없다. 대신, ‘블루 바를’ 커피만 있다. 태어나서 자란 부산의 학교와 학원에서 미국식으로 영어를 배웠지만, ‘블루 보틀’은 신기하게도 미국식 ‘블루 바를’이라고 발음해 본 적이 없다. 여기 ‘미쿡’ 동부의 사람들은 ‘블루 바를’이라고만 부른다.


사실, 도쿄 출장을 가면 일본의 엘리트들이 일하는 도쿄의 중심지 ‘오테마치’라는 동네에서 일을 하지만, 일본 최고 대학을 나왔다는 도쿄지점 엘리트 동료들의 영어 실력은 급할 때, "Sorry です [쏘리 데스]"를 내뱉는 영어이다. 일본은 큰 내수 시장 때문에 일본을 기준으로 제품을 만들고 일본 내수 시장에서만 성공해도 꽤 큰 성공을 이룰 수가 있으니, 영어에 대한 압박이 우리보다 낮다고 한다. 받침 발음에 취약한 일본어 고유의 특성과 영어에 대한 교육열과 압박이 우리보다 훨씬 덜 한 사회이다 보니 대학교육을 받아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드문 곳이 일본이다. 그래서 해외 출장이기는 해도, 도쿄 출장은 상대적으로 영어에 대한 부담이 없다. 내가 영어로 천천히 말해주기를 바라는 곳이니까. 그런데, 지금 이곳은 내가 근무하는 미국 보험 회사의 본부이면서, ‘블루 보틀’ 발음도 웃음거리가 되는 미국 동부이다.


국내파 영어이기는 하지만, 학생 시절에 히딩크 감독의 후임으로 우리 축구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적이 있는 네덜란드 출신 ‘본 프레레’ 감독의 통역으로 생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해 본 적은 없지만, 일을 하면서 영어가 크게 어려움이 된 적은 없었다. 수학을 제일 못하고 싫어했고 좋아하는 과목이 영어가 되어주어서, 다른 과목보다 관심이 높았으니 수학보다는 덜 힘들게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었다.



왼쪽. 본 프레레 감독.가운데. 대학생? ㅋㅋ


뉴저지 본사와 뉴욕을 오가며 일하는 출장 첫 주에, ‘석유화학과 플라스틱 산업(Petrochemical & Plastic Wokers)’을 주제로 하는 워크숍에 참석해야 했다. 외국 출장 중에 참석하는 워크숍이나 세미나의 이름에는 보통 ‘Global’ 아니면, ‘International’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기 마련인데, 이번 미국 출장 중에 참석하는 워크숍에는 ‘Global’, ‘International’ 아무 단어도 붙어 있지 않다. 이유는 미국에서 일하는 언더라이터, 미국인 직원만 대상으로 하는 워크숍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40명의 미국인 참석자에 외국인 게스트는 런던에서 온 영국 아저씨, 시드니에서 온 호주 동료, 그리고 서울에서 온 코리언 '나', 딱 세 명이었다. 40명 미국인을 위한 워크숍에 외국인 세 명만 게스트로 참석하는 오프라인 회의였다.


영어만으로 보면, 도쿄에서 ‘1등’하던 내 영어가 여기서는 빼박 디폴트(default)로 43등, ‘꼴찌’를 확정한 상태에서 참석해야 했다. 세 명의 외국인 중에 영국 런던에서 온 동료는 발표할 때마다, 미국인 입장에서 보면 본토 영어인 영국 발음 하나만으로 호감을 사기도 했다. 영국인 아저씨의 ‘bottle’ 발음은 [바를]이 아니라 [보틀]이어도 미국인들이 흥미로워했지만, 내가 발음하는 [블루 보틀]은 비웃음 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나름 부당한 차별이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영국인 동료 다음에는 호주 시드니 지점에서 온 동료가 프레젠테이션을 마쳤다. 호주인 특유의 여유로움이 프레젠테이션 스타일에도 묻어 나왔다. 호주식 발음(Aussie accent)이 강했지만 화려한 슬라이드를 준비한 시드니 지점 동료의 발표도 미국인 동료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발표를 잘 마친 호주에서 온 동료에게 미국인 동료들이,


“너, 영어를 진짜 잘하던데, 어디서 배웠니?”

라고 묻기도 했다.


“헐~ !!!!!!!!!!!!!!”,

호주 사람한테, 그런 칭찬을 하는 미국인 동료들은 미국식 악센트와 발음은 아닌 거 보니 너 외국인치고 영어를 참 잘한다는 의미였었다. 호주 동료의 영어는 Aussie(호주의, 호주식의) 악센트가 강하긴 하지만 찐 영어이다. 미국인에게 영어는 미국, 캐나다, 영국 정도를 떠올리며, 아마 호주 동료를 영어 실력이 좋다고 알려진 네덜란드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지만, 넓은 땅을 가진 미국인들은 사실 외국 여행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 편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사람들이 미국에서 미국인을 만날 때 종종 듣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간 엄청난 긴장감이 솟아올랐다. 내일 발표를 앞둔 나는 머릿속이 하얘져옴을 느낄 수 있었다. 호주 동료의 영어도 발음과 악센트가 약간 다르다는 이유로 이런 대접을 받는 곳이라는 생각에 밤을 새워서라도 발표 내용을 통째로 외워버리기로 작정했다. 영어로는 워크숍에서 ‘꼴찌’였지만, ‘꼴찌’ 티를 최소화시키는 것으로 목표를 잡았다. 압도적인 꼴찌는 되지 말아야 했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내일 발표를 할 수 있도록 일찍 자려고 했던 계획은 곤란한 상황을 맞았다. 일찍 자러 가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아직 시차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출장 첫 주에 맞은 큰일이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는데, 밤을 새워 일해야 했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 바로 다음 날 있을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펴고 대본으로 만들어 달달 외워버렸다. 며칠째 침대에서 뒤척이기만 하던 시차 적응 실패자가 되어 쪽잠을 자고 있는 나에게 닥친 난관이었다.


외워서 준비하는 발표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Q&A 시간에 질문은 예상할 수 없는 것이라 밤을 완전히 새워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도 대본으로 만들어 외워버렸다. 달달 외워서 준비한 덕에 발표와 워크숍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만, 주말이 되어서야 몸이 시차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뉴욕 맨해튼에 나가 뮤지컬을 보고, 뉴욕을 즐기고 싶었지만 이번 주말도 컨디션 회복과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호텔콕과 휴식을 결정해야 했다.


장거리 출장에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언제든 생길 수 있지만, 시차 적응과 체력과의 싸움이 되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출장을 가도 한국 사람이 많고, 우리와 비즈니스 문화가 비슷해서 술을 많이 마셔야 하는 도쿄와 홍콩, 싱가포르로 출장 갈 때는 편의점에 파는 숙취해소용 음료를 여러 병 챙겨야 했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장거리 출장은 숙취해소를 위해 그런 음료나 약을 챙기지 않아도 되지만, 시차 적응을 위한 약을 챙겨야 했다. 처방이 필요한 약물이 아니라 효과가 대단하지 않지만, 한국의 약국에서 ‘수면유도제’라는 것을 사야 했고, 미국에 도착하면 ‘멜라토닌’이라는 수면제를 사 먹어야 했다.


 멜라토닌과 젯 랙(jet lag)

  

시차 적응 실패라는 ‘젯 랙(jet lag)’의 후유증에 호주 동료의 영어 덕분에 압박감이 더해진 영어 발표로 체력과 멘탈은 일찍 소진되었다. 소화도 안되고, 처음 며칠은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어떤 날은 잠을 자기 위해 멜라토닌과 수면 유도제를 먹었지만 호텔 방에서 몇 시간 동안 천장만 바라보며 잠들지 못해 고생하기도 했다.


멜라토닌과 수면유도제는 ‘젯 랙’과 시차 적응에 종종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출장 횟수가 늘어날수록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출장기간 동안 꾸준히 먹다 보면 내성이 생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멜라토닌과 수면유도제의 효과는 미미해져 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멜라토닌은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낮은 약물이기는 해도 자주 오래 먹다 보면 복용량을 점점 올려야 효과를 보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면 많이 먹을수록 점점 길어지는 멜라토닌의 반감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오전까지 졸음이 느껴지는 부작용이 있다. 그래서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나 카페인 음료에 의존하는 나쁜 습관이 함께 생겼다. 잘 때 자고, 일어날 때 일어나는 당연한 신체리듬이 깨어지고, 그것을 약물과 카페인으로 다시 맞추려는 시도가 이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크게 망가지고야 마는 악순환의 시작일 수도 있는 문제이다. 


먼 나라로 출장과 여행을 다니면서 아직 시차 적응과 ‘젯 랙’은 극복하지 못한 과제로 남아있다. ‘젯 랙’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 보았고, 외국 출장이 훨씬 더 많은 미국인 상사를 만나 '젯 랙'을 극복하기 위한 조언을 구해보았지만, 미국인 상사는 ‘Cabin is our home...’이라는 의외의 쿨한 답을 주었다. 해외 출장이 잦은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비행기에서 잘 자고 일하는 스케줄에 맞출 줄 알아야지 너는 그러지 못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시차 적응 실패와 ‘젯 랙’을 인정한 나를 나약한 부하직원으로 여기고 있겠다는 걱정이 생길 뿐이었다.


이해가 안 될 때는 무모한 도전


영어 공부를 할 때 무조건 단어만 많이 외워두면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수학 공부를 할 때도 공식이 이해되지 않아도 무조건 공식만 외워두어도 시험칠 때 문제를 풀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젯 랙과 시차 적응이라는 문제도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일이다. 이해가 어려운 수학 공식처럼.


 ‘젯 랙(jet-lag)’은 결국 현대의 과학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정답 같은 해답이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다. ‘젯 랙’과 시차 적응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가 구상하는 ‘하이퍼 루프’나 지금보다 훨씬 빠른 미래의 비행기만 해결책이 될 것 같다. 대안으로 삼았던 멜라토닌도 결국 실패였다.


그래도 고심 끝에 선택한 차선책이 있다. 휴가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는 일이 업무가 되거나, 일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면 어떻게는 방법을 찾아서 적응시키고 일을 해내야 한다. 이해가 안돼도 공식을 외워서 시험에서 수학 문제를 억지로 풀어내는 것처럼.


가끔 도착 첫날, 짧은 지옥을 맛볼 수도 있는 방법이지만 효과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 차선책은 장거리 비행 시, ‘도착하는 첫날은 아무리 피곤해도 밤까지 버티거나, 김네다 도쿄 출장처럼, 도착 첫날의 일정을 만들어서 밤까지 일하는 것이다.’


단순 무식한 방법이고 내 몸에는 미안한 방법이지만, 시차 적응에 실패해서 며칠 동안 고생하는 것보다는 효과가 있는 확실한 대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힘들어도 하루만 고생하면 되니까. 첫날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면 바쁜 일정에 쫓겨 일주일 동안 고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안이라면 유일한 대안이다. 대신, 장거리 비행을 할 때는 그전에 컨디션 유지를 위해 잘 쉬어 두거나, 영양제를 충분히 챙겨야 한다.

  

시차 적응 실패, 소화 불량, 컨디션 저하로 힘들었던 뉴욕과 뉴저지 일정을 모두 마치고 다시 14시간을 비행하고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금요일 밤에 뉴욕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하늘에서 이틀을 잡아먹고, 일요일 아침에 도착한다. 토요일이 사라졌다. 뉴욕공항에서 밤에 출발하는 인천공항행 비행기를 타면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Itinerary(비행 일정표)에 ‘+2 days’라는 표시를 볼 수 있다. 이미 너무 피곤하지만, 일요일 아침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또 한 번의 ‘젯 랙’이 습격한다. 그런데, 뉴욕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돌아올 때의 ‘젯 랙’이 가장 힘든 일이다. 차선으로 택한 도착하는 날 하루만 고생하자는 전략도 큰 도전이 되는 날이다. 일요일 아침에 도착했기 때문에 저녁까지 잠을 안 자고 버텨야 하니까. 그리고 월요일 출근까지 해내야 했다.


시차 적응과 젯 랙에는 멜라토닌과 카페인, 과음에는 숙취 해소제, 피로에는 피로회복제를 먹고 영양제 주사를 맞는 것처럼, 현재의 녹록지 않은 일상에 다양한 보조 수단을 동원하여 오늘을 살아낸다. 갖은 어려움에도 오늘,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있다. 현재의 일이 힘들고 지치게 해도, 버티어 내고, 정답이 없어도 차선을 택하여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의 크기를 줄여나가기 위함이다. 힘들어도 오늘도 출근을 해내고, 출장을 다니고, 그 와중에 육아를 해내는 이유도 나와 가족의 미래 때문이다. 미래의 안정적인 자산 확보와 주거지 마련을 위해 은행 이자를 감내하고 리스크가 큰 줄 알면서도 여러 투자를 고민하는 것이 현재의 일이다.

  

‘현재’를 짧으면 오늘 하루, 길어야 한 달, 일 년으로 생각하지만, ‘미래’는 몇 년 뒤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라는 긴 시간이다. ‘현재’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미래이다. 느껴지는 시간은 짧지만 현재는 긴 시간의 미래를 생각하면 소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영어를 쓰는 미국 사람들은 ‘현재’를 ‘present’, ‘선물’이라고 말한다. 미래에 열어보게 될 ‘현재’의 선물 박스 속에 천국이 담기게 될지, 지옥이 담기게 될지는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일요일에 서울로 돌아오고, 월요일 출근인데, 비행기에서 사라진 하루, ‘토요일’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젯 랙’이 없고, 토요일을 잃어버리는 억울함이 없는 비행이 있다. 가까운 나라로 떠나는 긴 출장이다. 파견 근무로 가까운 나라에서 한 달 정도 혼자 지내야 하니 넉넉한 ‘미 타임’이 있고, ‘젯 랙’이 없는 곳이다. ‘한 달 살기’라는 좋은 어감으로 포장하고 싶은 ‘한 달 살기’ 홍콩 파견 근무이다. 다시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to be continued)

이전 03화 Me-time, 나를 위한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