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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로운 Feb 15. 2021

개복치의 일기에 대하여

서론, 브런치를 시작하며.

ESFJ의 입버릇은 '그럴 수 있지.'라고 한다. MBTI는 과학이라던데 역시나 ESFJ인 나 또한 그러했다. 다만 이유라고 한다면, 나의 경우엔 '타인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나를 지키기 위함'에 가까웠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사람들은 마음에 꽤나 많은 말들을 쌓아두고 지낸다.

-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어느 직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말의 어감과 어투가 일할 때 어떠한 결정의 척도가 되던 나로서는 사람들의 말과 작은 행동들이 크게 다가오곤 했다. 또한 나는 개복치(?)이기도 해서 작은 충격에도 금방 흔들리는 사람이고, 같은 의미여도 단어의 선택에 예민해했다.


가끔 어떤 사람의 생각이나 말이 필터 없이 내 눈앞에 들이밀어질 때 그걸 머릿속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법을 애써 고민하면서는, '더불어 사는 세상'이란 단어의 효용성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나 가까이 서로를 알아가며 더불어 살아야만 할까...?'


회사 사람들에게는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사진을 좋아하는 것도, 누구와 어떤 일상을 공유하는지도, 요즘 어떤 노후를 준비하는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괜히' 밝히지 않았다. 혹시 뒤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최소한 입에 오르내릴 거리를 적게 주는 것, 그게 내가 세상에서 나를 지켜 살아남는 길이라고 알았다.


하지만 성격적으로 말 많고 생각도 많은 사람에게 9 to 6 묵언수행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과 같은 업무로 더불어 살면서, 어느 순간엔 누구를 믿어서 내 일상과 가치관에 대해 논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일기에 적으면 입 밖으로 태어날 말을 종이에 가둬둘 수 있었다. 내가 무슨 고민을 하고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종이에 적으면 아주 멀리 안전한 곳에 있는 친구에게 털어놓은 것 마냥 편해졌다.


생각을 글로 적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 재수학원 때 처음 들인 버릇이었는데 여태 꽤나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곳에선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성공의 척도였다. 묵묵히 앉아 공부만 하고 친구들과 굳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 목표로 향해 가는 바람직한 자세라고 여겨졌다.


산골의 꼭대기 건물 안에서 덩그러니, 하루 종일 수업과 복습 혹은 과제만 하는 과정을 몇 달 반복하면서 처음으로 진정한 친구는 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제일 잘 이해하고 또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내 친구로서 내가 유일했다. 사실 그곳에선 그래야만 했지만, 그때부터 하루 있던 사건이나 마음들을 일기에 적어두곤 하니 자연스레 글 쓰는 습관이 들었다.


그때의 기록을 보면 그때의 나를 볼 수 있었다. 비록 회사를 다니며 체력의 한계로 지금은 매일 쓰진 못했지만 뒤돌아보면 그 모든 기록들이 나를 발전하게 하고 발전해 온 발자취만 같다. 지금도 그렇게 가둬둔 과거의 내 기록과, 생각과, 글무리를 빌려와 현재에서 인용하며 살게 되니 신기할 따름이다. 사람은 과거와 현재, 그 순간순간의 단편적인 자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던데, 그 자투리들이 이어져 이루어진 '나'라는 군상의 방향성은 다만 바람직하길 바랄 뿐이다.


소설가 김중혁은 새 작품을 쓸 때 과거에 적어둔 자투리 메모를 참고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한다. <출처: KBS 대화의 희열 - 아이유편>



브런치를 시작할 수 있게 되면서, 온라인이지만 이 안에서만큼은 어딘가 자유로워진 기분이 든다. 현재의 직장인인 나와 분리된 닉네임으로, 나로서의 생각들을 이 공간 안에 담을 수 있다니. 그동안 과거와 현재에서 굳이 혹은 차마 말하지 못했던 솔직한 생각들을 여기에 하나씩 브런치처럼 모아 담아보려고 한다. 다만, 또 다른 개복치가 상처 받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내 글을 읽는 누군가의 마음에 이것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 문장이 된다고 한다면, 이왕이면 좋은 영감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아직 미숙하지만, 노력하다 보면 진실한 이 마음만은 언젠가 가닿을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또 하나의 발자취를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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