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는 진실처럼 보이지만, 고통을 감추기도 한다
사람들은 숫자를 신뢰한다.
백분율로 말하면 믿고, 그래프로 보여주면 납득한다.
“30% 상승”, “1.8배 증가”, “87% 만족”
숫자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사실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숫자 뒤에 있던 고통은 어디로 갔을까?
예를 들어, 실업률이 0.5%포인트 줄었다는 기사는
취업에 실패해 매일 자존감을 깎이며 버티는 수많은 사람의 눈물은 담지 않는다.
월세 평균이 3만 원 떨어졌다고 하면,
방값이 5만 원 올라 이사를 결심해야 했던 한 청년의 선택은 사라진다.
숫자는 보여주는 동시에, 지운다.
‘1인당 GDP 4만 불’이라는 숫자엔
초등학생을 혼자 두고 하루 12시간 편의점에서 일하는 엄마의 삶이 없다.
‘자영업 폐업률 10%’는
가게 문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200만 원의 카드값을 보는 아버지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통계는 유용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것을 ‘마지막 언어’처럼 취급한다.
그래서 “근거를 대라”고 요구할 땐 숫자를 가져오지만,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은 감상적이라며 잘라낸다.
지하철 안의 피곤한 눈빛,
경쟁에 지친 학생의 말없는 무표정,
월말 카드값에 눌려 멍해진 가장의 한숨—
이건 데이터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뤄진다.
문제는 그 숫자들이 누군가의 시선으로 조작되고 요약되는 과정에서 이미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평균’이라는 단어 하나로 기형적인 분포가 무마되고,
‘성장률’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의 농도가 덮인다.
우리는 숫자를 진실처럼 여기도록 훈련받았다.
정책은 통계에 따라 움직이고,
언론은 데이터로 사람들을 설득한다.
하지만 인간은 통계가 아니다.
고통은 수치가 아니라, 체감의 문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숫자엔 내가 없다”고.
우리는 숫자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숫자만으로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느낌’이 진실을 더 가까이서 말할 수 있다.
감정은 주관적이지만,
그 주관이 모일 때 비로소 사회가 보인다.
우리는 ‘정확한 데이터’를 넘어,
‘정직한 서사’를 복원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