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 부족”, “태도 문제”라는 말이 구조를 덮는다
요즘은 가난한 사람도 욕을 먹는다.
과거엔 가난이 동정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지적의 대상이다.
"열심히 살면 되잖아."
"그렇게 살아서 그래."
"요령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노오력도 안 하잖아."
가난은 더 이상 불운이 아니라 결함으로 간주된다.
성격의 문제고, 습관의 문제고, 의지의 문제다.
그렇게 사람들은 이제 가난을 “불쌍하다”고 하지 않고 “답답하다”고 한다.
이 이상한 변화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아마도 그 출발은, 구조적 설명이 사라진 사회에서일 것이다.
실업률, 비정규직, 주거비 상승, 교육 격차
이 모든 거대한 원인들은 너무 복잡해서 기사 뒤로 밀리고,
그 자리를 자기계발서 한 권 분량의 설명이 대신한다.
“매일 5시 기상”, “실패는 태도의 문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구조는 잊히고, 태도만 남는다.
가난을 설명하는 언어가 ‘노력 부족’으로 바뀌는 순간,
국가와 사회는 면죄부를 받는다.
문제는 당신이지, 시스템이 아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점점 잔인해진다.
“가난한 건 괜찮아. 하지만 가난한데 태도가 나쁘면 안 돼.”
“당신도 커피값 아끼고, 주식 공부하고, 시간관리만 잘하면 올라갈 수 있어.”
그러니까 실패하지 마.
그리고 실패했다면, 조용히 반성해.
그 침묵 속에서 수많은 사람은 고립된다.
월세 밀려 이사 다니는 사람, 비정규직으로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
알바를 전전하다 취업 연령을 넘긴 사람.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욕먹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도
가난한 사람에게 “왜 가난하냐”고 묻는다.
하지만 부자에게 “왜 그렇게 부유하냐”고 묻지는 않는다.
그건 노력의 결과고, 당연한 보상이라고 여긴다.
반면 가난은 ‘이상한 일’로 간주된다.
다들 똑같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왜 너만 실패했느냐고.
그런데 정말 똑같은 사회인가?
출발선이 다르고, 부모의 자산과 지역의 교육 수준이 다르고,
채무의 유무와 사회적 관계망의 깊이가 다른데
그걸 단순히 “노력”으로 재단할 수 있는가?
이런 사회에서는 가난마저도 경쟁의 결과로 취급된다.
그리고 경쟁에서 밀린 사람은 패배자로 취급받는다.
그러니 가난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을 숨긴다.
가난은 어느새 개인의 결핍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묻자.
정말 가난은 성격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가 구조를 잊고 싶어서 덧씌운 핑계인가?
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리고 실패도 ‘성격’이 아니라,
시스템이 감당하지 못한 다양성의 증거일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복잡하게 말할 용기를 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다”라는 편리한 문장 대신,
“가난은 어떻게 반복되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꺼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