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직장’을 갖는다는 것의 철학

노예제는 사라졌지만, ‘출근’은 남았다

by Simon park

‘출근’이란 단어는 언제부터 이렇게 뻑뻑해졌을까.
아침 8시, 서초역을 나오는 직장인들의 얼굴은 일제히 뭔가를 견디고 있었다.
회사 앞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 들고 걸음을 재촉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노동이었다.
출근 전 노동.


지금 한국에서 ‘직장’은 더 이상 하나의 일터가 아니다.
그건 정체성이고, 인격이고, 자기소개이자 생존 수단이다.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은
‘어디에 속해 있느냐’는 확인이다.
사람은 그 사람의 회사가 되고,
그 사람의 연봉이 되고, 그 사람의 명함이 된다.


노예제는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목에 건 사원증은 새로운 쇠사슬이 되었다.

그 사슬은 명확하지도, 강요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휘감긴다.
그리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회사 사람’이라 부르며 기꺼이 동화된다.


직장이라는 공간은 기묘하다.
8시간 동안 ‘나’는 사라지고, ‘직무’만 남는다.
창밖에 봄이 와도, 아이가 아파도, 노모가 병석에 누워 있어도,
그 시간 동안엔 업무가 우선이다.
인간이 아닌, 역할로서 기능하는 시간.


그래서 퇴근길엔 몸보다 마음이 더 고단하다.
‘하루 종일 나 아닌 척했다’는 피로가 버스 손잡이 하나에도 무게로 다가온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한다.
“그래도 직장이 어딘데…”
“직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그 말엔 어떤 냉소가 숨어 있다.
사람이 일을 택하는 게 아니라,
일이 사람을 선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체념.


과연 직장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뭘까?
월급? 사회적 안전망? 아니면 소속감?
어쩌면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나도 여기에 속해 있다’는 존재의 증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직장은 우리 삶에서 너무 많은 걸 가져간다.
가족과의 시간,
낮의 햇살,
머뭇거릴 수 있는 여유,
그리고 나 자신을 잊지 않아도 되는 권리.


이제는 묻고 싶다.
‘직장’이란 구조는 정말 인간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점점 더 기계처럼 되어가는 과정의 장치인가?


지금 ‘직장’을 갖는다는 것.
그건 월급을 받는다는 것 이상으로,
자기 시간을 파는 일이고,
자기 감정을 미루는 일이며,
자기 삶의 주권 일부를 위임하는 일이다.


그게 정말 전부일까?

직장을 가지는 것만이 성실함의 증명이고,
그만두는 순간은 항상 ‘패배’로 기록돼야 할까?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일이 삶을 위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삶을 일에 맞춰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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