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는 진짜 우리를 해방했는가?
자유는 축복인가, 짐인가.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 사회는 자유를 갈망했다.
검열, 통제, 획일성. 자유가 사라진 시대의 공포를 우리는 역사 교과서로, 혹은 어른들의 한숨으로 배웠다. 그래서 자유를 얻은 지금, 우리는 행복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고르고,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누구인지 연출할 수 있는 시대다.
회사도, 지역도, 종교도, 심지어 가족의 형태도 선택 가능한 사회.
우리는 전례 없이 많은 선택지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불안한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를 '유동하는 공포의 시대'라 말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고, 어떤 것도 고정되지 않은 상태.
그는 말한다. "자유는 우리가 얻은 만큼,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옥죈다"고.
선택이 많을수록 실패의 책임도 개인에게 돌아간다.
직장을 잃으면, 그것은 구조조정 때문이 아니라 '내 선택의 실패'가 된다.
연애가 어려운 것도, 결혼이 늦는 것도, 모두 '내 책임'으로 전가된다.
사회는 책임을 분산하지 않고, 개인에게 몰아넣는다.
결국 지금의 자유는 '책임의 사유화'라는 가면을 쓴 구조적 무관심일지도 모른다.
국가는 개인을 해방시킨 게 아니라, 스스로를 경영하게 만든 것이다.
자기계발, 퍼스널 브랜딩, 셀프 리더십.
모두 '자유인의 교양'처럼 포장됐지만, 실은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지 않는 영역을 개인에게 위임하는 방식이다.
자유는 그래서 경쟁의 다른 말이 되었다.
고등학생은 자유학기제 아래 성적 대신 프로젝트를 하고, 직장인은 자율성과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24시간 연결된 채 살아간다.
프리랜서와 플랫폼 노동자는 더 이상 상사에게 보고하지 않지만, 알고리즘이라는 상사에게 매초 감시당한다.
자유는 더 이상 해방이 아니다.
이제 자유는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이런 세상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곧 불안을 관리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더 좋은 삶을 상상하기보다 지금의 위치를 잃지 않을 방법을 고민한다.
자유는 선택지를 제공하지만, 선택의 결과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자유가 많아질수록,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줄어든다.
불안은 그래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결과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자유주의는 누구를 위해 설계되었는가?
자유를 준다는 명목으로 책임을 넘긴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불안을 내면화한 개인.
지금 우리가 겪는 이 고립감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설계다.
자유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 자유가 공동체를 해체하고 불안을 양산하는 방식이라면, 우리는 다시 자유의 정의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는 혼자 사는 기술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방식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