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차 마케터의 백수 생활 일기
3월 말에 퇴사를 했으니, 백수가 되고 약 백일이 지났다.
늦은 저녁잠을 자고 일어나 소파에서 멍하니 뒹구는데 생각이 났다. '한 백일 동안 놀았구나.' 아직도 시간 효율성 따지던 워킹맘 시절 버릇을 버리지 못해 그래서 나는 그 백일 간 과연 충분히 잘 놀았을까 돌이켜보고 싶었다.
직장 생활에 허덕일 때엔 회사를 그만두면 할 것들에 대해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모두 사소한 것들이다. 뒹굴거리며 실컷 책만 보기, 산책을 많이 하기, 운동하기, 못 만난 사람들 만나기, 미뤄둔 서랍장 정리를 하기 등. 나의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일하거나, 육아하거나, 살림하거나 였기 때문에 저런 사소함이 주는 비움과 나를 돌보는 시간이 그렇게도 목말랐는지 모른다.
평일의 낮시간이 어색했던 것도 몇 주가 지나니 익숙해졌고, 집에만 있으면 답답해한다는 그 병적인 증상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처음엔 매일 뭔가 하나를 정해 집을 나섰다. 조조영화도 보고, 약속도 잡고, 홀로 브런치도 하고, 뒷산 등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제일 하고 싶었던 책 읽기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집에서 먹고, 커피 마시고, 책 보고, 씻고, 핸드폰 하고, 컴퓨터 하고 하는 게 내가 그토록 찾던 시간 효율성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이가 유치원을 다녀오는 그 6-7시간 남짓한 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조금씩 더 잘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빈 둥 거리며 시간을 보내도 '괜찮다'라고 말하고 생각하는 연습은 아직도 하는 중이다.
스트레스로 인해 스스로 빵 터져버릴 것만 같았던 직장 생활도, 팀장에 대한 혐오도, 남편과의 긴장도, 아이에의 짜증도 백일 간 옅어져 갔다. 홀로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고, 나를 돌볼 시간도 많아졌다.
심리학 책을 뒤적이며, 나에 대한 공부가 중요하며, 타인의 기준에 맞춰 생각하거나 살지 않아야 한다는 걸 다시 깨닫는 중이다.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흘려보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실천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왜 좋아하며, 어떨 때 가장 행복한지를 고민한다.
그래서 이 고민에 답은 있을까. 글쎄, 앞으로도 여전히 갈팡질팡 하며 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지난 백일을 잘 보냈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드디어 내 삶에 '여유'라는 것이 조금은 자리 잡은 것 같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모두에게 쉼표가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