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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한손수레 Feb 28. 2023

더 이상 그가 부럽지 않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


남아선호사상이 깊이 뿌리 박혀있던 할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던 내가 보기에 오빠는 그야말로 모든 걸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오빠는 첫 손주였기에 할머니의 절대적 사랑은 물론 다른 친가 어른들의 사랑조차 압도적으로 받는 사람이었다.


"너는 저~기 진주 남강 다리 밑에 니네 엄마 찾으러 가봐. 거기 호떡 굽고 있을 거니까."

별거 아닌 장난에 운다며 나는 또 친가 어른들께 놀림받기 일쑤였지만 오빠는 그 별것도 아닌 장난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늘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어딜 가나.

세 살부터 여든까지 모두가 오빠를 좋아했다.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많았고 하나같이 오빠에게 호의적이었다. 한 번도 반장이 아닌 적 없었고 전교회장이 아닌 적 없었다. 과대부터 총학생회장까지.


아직 초등저학년일 때, 오빠가 고학년이 될 쯔음부터는 반으로 고학년 언니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니가 백종하 동생이야?"

"네."

"이것 좀 종하한테 전해줄래?"


어릴 때부터 지나가던 모르는 어른들이 애기 이쁘다고 용돈을 쥐어주고는 했다고 하는 엄마 말처럼 오빠는 잘생겼다고 주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일면식도 없던 그녀들의 사랑을 전하는 향단이가 되어있었다. 내 졸업식에서도 오빠가 오자 친구들이 술렁거렸던 기억이 있다. 사실 아직도 난 잘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 새언니도 매번 오빠가 제일 잘생겼고 멋있다는 데... )


뭐, 어쨌거나 그런 오빠가 나도 자랑스러웠다.

세 살부터 여든까지 남도 좋아하는 오빠인데 나는 오죽할까.

나는 누구보다 오빠를 자랑스러워하고 좋아했지만 부러움에 지기 싫어 꽁꽁 숨겼다. 그럼에도 돈이 필요할 때 다가와 다정함을 선사하는 오빠에게 내 전재산을 홀라당 넘기기도 했지만.


오빠에게 나는 특별할 것 없는 동생이었고 여느 남매처럼 별다른 교류 없이 각자의 인생을 살았다. 내가 모르는 오빠의 여자친구를 사촌 동생이 알고 있을 때 서운함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 듯 어느샌가 오빠에게 선을 긋기 시작했다.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한 만큼 그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군대로 인한 오빠의 부재는 나의 사춘기적 감정의 고삐를 놓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눈치 볼 것 없이 날뛰었던 그 시절은 내 인생의 가장 최악의 암흑기였다.


시간이 흘러 여전히 겉돌던 나와 오빠는 우연한 기회에 술자리 앞에서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어렵게 용기 내어 나의 이야기를 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오빠는 납득할 수 없는 단어를 꺼냈다.

자격지심

오빠의 눈과 말에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가득했다. 이해와 위로를 바랐던 23살의 나는 26살 오빠를 탓했다.


'오빠야, 넌 다 가졌으니까 이해 못 하겠지. 결국 넌 나와 애초에 다른 사람이니까. 넌 다 갖고 태어났잖아. 절대 이해 못 해 넌.'


오빠가 꼴도 보기 싫었다.

운 좋고 사랑 가득한 사람으로 태어나 운을 탓하고 있는 날 답답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게 재수 없었다.

본인이 노력해서 얻은 게 있긴 한가, 뭐가 잘났다고 내게 그런 소릴 하는지 오히려 내가 역정이 났다. 정작 본인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저 형식에 불과한 정답을 말하는 척 하기는.


고등시절 이후 내내 겉돌던 23살의 나는 결국 집에서 독립할 계획을 세웠고 이내 독립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가족들과의 연락은 내가 만든 의무의 선을 지킬 정도로만 유지했다. 늘 지독하게 외로웠고 홀로 싸워야 했다.


부지런히 흘러간 시간 덕분인지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 준 남편 덕분인지 조금씩 나는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처음 남편을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날, 남편의 여러 가지 조건을 빌미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우리 두 사람은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남편은 본인의 부족함이라 하고 나는 그런 남편을 행여나 부모님이 무례하게 대하진 않으실까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빠의 배려로 우리들의 식사자리는 어색함보다는 즐거움으로 가득할 수 있었다. 처음엔 그저 오빠에게 고마웠다. 오빠의 배려가 고마웠고 오빠의 친절이 감사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 무의식 중 과거가 삐집고 나왔다.


오빠와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진솔했던 그때 그 대화.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생겼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거야. 니가 아는 게 다가 아닐 수 있어."


어릴 때부 오빠는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해 왔고 공감을 통해 아낌없이 자기 것을 내어주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일에도 스스로 총대를 메기도 했고 늘 다른 사람들과 감정으로 소통하며 의견을 조율하는 게 그의 장점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돌아오는 사랑은 스스럼없이 먼저 사랑으로 다가가 베푼 부단히 노력한 결과였다. 그런 26살의 그는 그의 방식대로의 사랑받아 온 방법 밖에 몰랐다. 다른 사람은 돌아보지 않으며 내가 못 가진 것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동생의 상처가 그에겐 모순이었을 지도.


그때의 오빠가 이야기했던 '자격지심'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때의 내 눈에 비친 오빠의 답답함이 사실은 안타까움이었음을 지금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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