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는 사투리가 아니랍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서 경상도에 살지 않는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사투리에 관한 에피소드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억양도 억양이거니와 사투리가 아닌 독특한 표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주 예전에 쌀 팔아주러 간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영어로치면 수동태같은 걸까? 능동 수동 혹은 사역동사? 이런 말로 설명하고 싶지만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여튼 쌀을 사러 가는 것을 쌀을 ‘팔아주다’ 또는 ‘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최근엔 전혀 쓰지 않는 말인 듯하고, 나는 아주 어린 시절에 간간히 동네 어른들이 쓰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얼마나 어린 시절이냐고 하면, 집 근처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지 15년이 지난 그 곳에 쌀만 전문적으로 파는 상회가 있던 시절에. 그 '상회'에 쌀을 사러 가는 어른들이 쌀 팔러 간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할머니들께서 너무 자연스럽게 쓰던 표현이라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이 없었는데 중학교 때인가 선생님이 경상도 사투리 중 재밌는 표현이 있다며 가르쳐주셔서 비로소 이상한 표현임을 의식하게 되었다.
요즘 많이 보이는 말은 ‘잠 온다’이다. 정말 잠이 오는 게 재밌게, 또는 귀엽게 느껴지는 걸까? 잠 오는 게 뭐가 이상할까? 싶은데 잠을 의인화시킨 표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 역시 이 말이 귀엽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니 그렇기도 하다. 잠은 과연 어디서 오는 걸까? 나에게 총총총 걸어오고 있는 걸까? 이 의인화 된 느낌이 잠온다는 표현을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애교적인 표현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물론 잠 온다는 말은 잠 와♡이런 느낌이 아니라 '아... 잠 온다-_-죽겠다-_-'이런 느낌에 가깝긴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과 받아들이는 사람이 다른 말 중에 하나인 듯하다. 성별을 바꿔서, 이 말을 남자가 한다고 해도 귀엽다고 느껴지는 걸까? 남자가 했을 때 귀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편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사투리가 귀엽게 느껴진다는 고정관념에서 기인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투리가 귀엽다 구수하다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이나 글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사용하는 사람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도 해야하는 것이니까. 내가 귀엽자고 쓰는 말이 아니듯, 누군가는 구수하자고 쓰는 말도 아니다.
오빠야라는 말도 역시 그렇다. 온갖 미디어의 영향으로 이 말은 애교 섞인 말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친오빠에게 존대를 쓰지 않을 때, 이름 뒤에 붙이는 '야'를 오빠에 붙인 말이기 때문에 거의 반말에 가까운 말이다. 비슷한 말로 '언니야'가 있는데 이 말은 오빠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귀엽다거나 애교의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변의 자매나 남매 사이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언니야가 훨씬 더 친근한 표현일 것이다. 오빠야는 이름도 부르고 싫은 호적상의 존재를 부르는 하나의 명사+조사의 낱말일 뿐이다.
다시 잠온다는 말로 돌아와서, 반대로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졸려라니? 너무 낯 간지럽다. 그리고 잠이 온다는 말은 잠이 오면 안되는 상황에서 잠이 올때 쓰고, 졸리다는 말은 자도 되는 상황에서 눈이 감길때 쓰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마 아닐 것이다. 단지 두 단어를 내가 저런 뉘앙스의 차이를 살려 다르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졸려와 잠와는 결국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하지만 졸려와 잠와는 서로의 표현을 낯설어 하면서 다르다고생각한다.
표현도 있지만, 억양에 있어서도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온도차이가 나는 것을 느낀다. 부장님이 나를 불러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 듣기 싫은 소리도 있지만, 수용하고 발전시켜서 생각하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듣기 싫은건 넘기고, 수용할 것만 수용하면 된다. 그런데 부장님과 면담이 끝나고 나면 꼭 다른 직원들이 부장님 너무 무섭다고 하며 괜찮으냐고 위로해줬다. 나에게는 너무 다정다감한 조언처럼 들렸는데 말이다. 상사도 나에게 좋게 좋게 이야기하려고 했고, 나도 그걸 좋게 받아들였다. 이정도는 억양에서부터 느껴지는데, 제대로 된 상사라면 이런 상황에서 곤두선 억양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투리와 억양을 떠난 단어들이 있다. 바로 욕이다 욕은 귀엽게 들릴까? 오빠야라는 억양으로 욕을 한다고 욕이 욕이 아닌게 되는 걸까? 다정다감한 억양으로 욕을 한다고 고분고분하게 들릴까? 그런 건 없다. 욕은 욕이다. 어떤 사람, 상황, 순간에서도 나의 분노를 욕으로 표출하는 건 무섭다.
물론 미디어 학습한 효과로 사투리를 쓰면 욕이 더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 역시도 그렇게 받아들일 때가 있다. 하지만 사투리가 아니더라도 부당한 상황이나 열 받는 상황에서 나오는 욕은 누구나 위협적이고 말의 뜻을 효과적으로 더 강조해준다. 수도권 사람들이라도 –특히 십대가 우르르 몰려 있을 때 - 욕을 섞어가며 말을 하고 있으면 무섭고, 피하고 싶다. 정말 자동으로 어깨를 둥글게 말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걷게 된다. 누가봐도 양아치같은 애들이 모여서 아, X발, X나 등을 섞어가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맛,서울말로 하는 욕이라니 너무 약하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어디선가 사투리에도 권력구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유달리 경상도 사람들은 사투리를 안 고친다고. 아마 기득권들이 많이 써서 그 문화를 답습한것이라고 추측하며 못 고치는 것도 있지만, 권력이기때문에 '안' 고치는게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그럴 때의 비교 대상은 다른 지역의 사투리였다. 호남이나 충청 지역 사람들은 사투리를 잘 고치는데, 경상도는 아니라고. 그러면서 꼭 고치라는 건 아니지만 경상도 사람들은 유달리 티가 난다는 사족을 덧붙인다.
하지만 경상도 사투리가 권력이 있어 봤자 서울말만 하겠는가? 권력의 우위에서 영호남의 싸움만 붙인 채 서울은 표준어라고 쏙 빠진다. 심지어 모두들 표준어를 쓰지도 않으면서! 여자들을 빨리 고친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빨리 고치는 게 아니다. 노력할 뿐. 안 고쳐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기때문에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도 아닌데 왜 고쳐야하는건지도 잘 모르겠다. 문화권이 다른 것도 아니고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은근히 서울말 쓰기를 종용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한다.
이렇게 사투리에 관한 에피소드를 풀어놓을 때면, 사투리를 대하는 나의 자세도 하나가 아니라서 참 어렵다. 굳이 왜? 고쳐야할 게 아닌데 안 고쳐도 되지 않나와 어떻게든 말투로 편견을 가지게 하고 싶어 하지않아 고 치려는 나 사이에 오늘도 애매한 경계에서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