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스캥 데프레에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까지
다보스에서 안델핑겐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겨울 여행의 끝이다. 낼이면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아침에 찾은 곳은 이팅겐 수도원이다.
지은 지 850년 이상 된 시골 수도원이 청정한 자연 속에 호젓한 분위기로 우리를 맞이한다. 우리뿐이다. 마치 우리나라 산사와 같은 느낌이다. 메인 건물로 들어가니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다.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예배당 역시 예상 밖이다. 이곳 토박이인 아저씨도 처음 와보았다고 한다.
어지간한 수도원에서는 직접 와인을 만든다. 미사에 쓸 것이기도 하고, 오염된 물을 대신할 음료로 와인이 꼭 필요하던 시절 수도원의 주요 소득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원은 대개 물이 잘 빠지는 언덕배기 포도밭을 끼고 있다.
이팅겐 수도원 안에도 양조 공정을 소개한 모형 전시 공간이 관람객을 맞는다. 그러고 보면 음악가들의 주량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다. 확실한 것은 무소륵스키가 술고래였다는 것이다. 레핀이 그린 유명한 초상화에도 그의 뺨과 코는 새빨갛다.
수사들이 생활하던 공간도 복원해 놓았다. 딱 발 뻗을 만큼의 공간만 허용된 침상. 의외로 키가 상당히 작았던가 보다. 스트라빈스키보다 큰, 그러니까 160센티미터를 넘는 사람은 새우잠을 잤을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책상 위에 놓인 책이다. 이 루터 번역 성경은 베토벤이 사망한 1827년에 출판된 것이다. 무려 190년 전에 나온 책을 그냥 일반인이 펼쳐볼 수 있도록 비치했다. 눈을 씻고 봐도 만지지 말라는 경고는 없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미 누군가 가져가 진품명품을 가리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시편의 마지막 장을 열어 본다.
숨 쉬는 모든 것들아, 야훼를 찬양하여라, 알렐루야
바흐가 모테트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부르자Singet dem Herrn, BWV225>의 마지막을 이 구절로 마친다.
멘델스존이 교향곡 2번 ‘찬가Lobgesang’를 역시 바흐의 선례대로 작곡했다. 구텐베르크의 성서 인쇄 400주년을 기념해 출판 인쇄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된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시편 교향곡>도 같은 가사로 마무리된다.
알렐루야, 라우다테 도미눔 인 상크티스 에유스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 하바드 대학에서 ‘음악의 시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다. 2015년에 불어판 원전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역자는 이 책이 70년 만에 국내 독자와 만난 것이 늦은 감이 있지만 기쁘다고 밝혔다. 그러나 영어판이라면 1981년, 스트라빈스키가 세상을 떠나고 10년 되던 해에 이미 국내에 번역되었다. 역자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 강연이 있은 지 40여 년만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스트라빈스키의 역사적인 강연집이 소리 소문 없이 잊혔다가 2015년에 마치 처음인 듯이 독자를 찾아왔을까? 너무 수요가 적었기 때문이거나, 내용이 썩 중요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가지 모두일지도 모른다.
먼저 수요가 적은 것이야 당연하다. 스트라빈스키의 책이라면 하바드 아니라 노벨이라도 우리말로 호응을 얻기란 쉽지 않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까지 닿기도 이렇게 먼데 하물며 글을 찾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문제는 담긴 내용이다. 솔직히 그조차 내게는 썩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책은 매우 중요하다. 역자도 언급했듯이 《음악의 시학》은 프랑스 음악학자 알렉시스 롤랑 마뉘엘의 대필 저작이다. 역자는 롤랑 마뉘엘의 라디오 방송 원고도 《음악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기 때문에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번역에 임했다고 한다.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의 시학》에서 - 롤랑 마뉘엘의 필력을 빌어 - 자신의 입지를 설명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스스로 반독일-친이탈리아 작곡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이 강연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그는 음악의 본질을 멜로디라고 규정한다. 멜로디가 곧 서양음악의 뿌리였고, 그것은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를 통해 만개했다. 그때 그 반대편에 독일의 리하르트 바그너가 나타났다. 바그너는 멜로디를 쓸 줄 몰랐고 대신 ‘끝없는 반음계 선율’(곧 선율이 아니라는 말이다)을 통해 음악을 어두운 구렁텅이로 데려갔다. 그 어둠은 너무도 깊어서 이탈리아의 밝은 태양을 안고 태어난 베르디조차 헤어날 수 없는 블랙홀 같았다. 결국 만년의 베르디도 바그너 진영으로 기울고 만다.
한편 러시아 음악은 미하일 글린카(1804∼57)라는 이탈리아 정신의 계승자와 더불어 시작했다. 그러나 글린카 덕에 민족을 자각하고 하나로 뭉친 후배 ‘5인조’ 그룹은 점차 아카데미즘으로 기울었다. 스트라빈스키에게 권위적인 음악은 곧 독일 음악을 뜻했다. <스타워즈>식으로 말하자면 ‘포스의 어두운 면’이다. 반면 5인조에 대항하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밝은 이탈리아를 바라본다. 그는 어두운 독일에 기운 러시아, 아니 서양 음악 전체를 구해줄 멜로디의 ‘야릴로’, 멜로디의 태양이었다.
음악사에 밝지 않은 사람이라면, 스트라빈스키라는 거물이 하바드 대학의 수준 높은 인문학 강의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면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음악을 귀로 확인하지 않고 말로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스트라빈스키조차 인정했듯이 위대한 베토벤도 멜로디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무리하게 멜로디 주도론을 이어간다. ‘반독일 친이탈리아 프레임’의 핵심이 바로 멜로디, 선율인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의 초기 성공작 <불새>, <페트루시카>, <봄의 제전> 3부작이 5인조의 중심인물이자 스승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친 바그너이자 차이콥스키의 라이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숨긴다.
스트라빈스키가 러시아 민속에 뿌리를 둔 원시주의 음악 이후 평생 유지할 스타일이 신고전주의이다. 고전주의가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를 모델로 한 것처럼, 신고전주의는 다시 근대 고전을 모델로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와 고전주의의 간극이 1천5백 년 이상이라면 고전주의로부터 신고전주의까지는 기껏해야 200년 안쪽이라는 것이 차이이다. 그러나 토마스 만의 ‘깊은 우물론’에 비추어보자면 스트라빈스키는 선배들이나 자신이나 베낀 것은 별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심지어 스트라빈스키와 그에게 ‘궁극의 고전’인 차이콥스키의 간격은 반 세기 밖에 되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요즘으로 치면 선배를 표절한 것이고, 아무리 토마스 만 식으로 멋지게 포장해도 ‘패러디’에 불과하다. 스트라빈스키가 이탈리아의 고전인 페르골레시의 음악을 가지고 만든 <풀치넬라>부터 차이콥스키의 멜로디를 재구성한 <요정의 입맞춤>까지 모두 이런 신고전주의의 강령에 충실한 것이다. 결국 스트라빈스키 자신도 멜로디를 직접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이 하바드 강연 뒤 만년에 들어 그 스스로 경계했던 아카데미즘으로 기울고, 라이벌인 쇤베르크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12음기법마저 신고전주의의 재료로 받아들인다.
멜로디가 있고 없고 간에 오늘날 바그너의 음악과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가운데 애호가가 더 많이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는 쪽이 어디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스트라빈스키의 - 또는 롤랑 마뉘엘의 - 《음악의 시학》은 서양음악의 말단에서 정통성을 부여잡으려고 애쓰던 작곡가가 스스로 ‘선택된 인간’이 되기 위해 만든 부적, 곧 ‘요정의 입맞춤’과 같은 것이다.
나는 스트라빈스키와 롤랑 마뉘엘의 발칙한 도발 흔적을 《안데르센 자서전》에서 발견하고는, 그동안 무릎은 너무 많이 쳤으므로 이번에는 턱을 빠트리기로 했다. 마치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가 스트라빈스키의 자서전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복사해낸 것처럼, 스트라빈스키와 롤랑 마뉘엘은 안데르센의 이야기로부터 하바드 강연의 뼈대를 가져온 것이다. 이 또한 신고전주의인가! 안데르센의 탁견은 이렇다.
바그너는 지금, 나의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가장 훌륭한 작곡가로 손꼽힌다. (중략) 그러나 그는 음악의 꽃인 멜로디가 부족하다. (중략) 음악만 놓고 보자면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거대한 음악의 파도가 내 몸과 마음을 덮쳐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중략) <로엔그린>은 내가 보기에 훌륭하게 잘 생긴 나무이다. 하지만 꽃과 열매가 없다. 이 말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나는 영향력 있는 음악 비평가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감히 이런 평가를 할 수 있는 건, 음악도 문학이나 마찬가지로 지성과 상상력 그리고 정서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정서는 무엇보다 선율로 표현되는데, 선율이라는 꽃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 바그너는 생각하는 작곡가이다. 지성과 의지를 가장 큰 무기 삼아 낡은 것을 깨부수는 작곡가, 그가 바로 바그너이다.
가능했다면 하바드 대학은 스트라빈스키가 아닌 안데르센을 노턴 강좌에 초대했어야 했다. 아멘! 안데르센의 바그너 예찬이 중요한 까닭은 그가 사실은 벨칸토 오페라 신봉자였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벨칸토 성악가 제니 린트가 안데르센의 나이팅게일이지 않았는가!
어쩌면 그가 음악가가 아닌 작가였기 때문에, 그리고 덴마크라는, 상대적으로 음악의 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했을 것이다. 안데르센은 스트라빈스키처럼 열등감에서 비롯된 편 가르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스트라빈스키와 안데르센이 바그너의 선율 부재에 대해 나란히 언급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안데르센의 자서전에는 또 한 사람 뜻밖의 인물이 나온다. 바로 샤를 구노이다.
구노의 <파우스트>를 처음 보고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자꾸 보았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극적인 음악 그리고 현란한 장식들!
이렇게 시작하는 안데르센의 구노 예찬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의 시학》에서도 반복된다.
파우스트를 보세요. 이 유명한 오페라가 처음 나왔을 때 비평가들은 구노의 창의적인 멜로디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구노 하면 멜로디’라고 할 만큼 그의 지배적인 재능이 멜로디에 있다고 보는데 말입니다.
또한 <필레몽과 보시>라는 구노의 진귀한 오페라를 <마브라>의 모델로 삼았던 스트라빈스키가 아니었던가. 이 또한 우연이라면 할 말 없다. 그러나 안데르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팅게일>과 <요정의 입맞춤>의 원작자이다.
나는 스트라빈스키가 20세기 모든 예술가 가운데 가장 악마와의 거래에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병사 이야기>의 조셉이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바홈이 바로 스트라빈스키였고 《파우스트 박사》의 아드리안 레버퀸으로 그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다. 오히려 쇤베르크가 자신을 악마의 하수인으로 모욕했다고 토마스 만에게 발끈했으니 스트라빈스키로서는 어깨를 으쓱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스트라빈스키는 그 누구보다 큰 키스마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차이콥스키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처럼 많은 후배들이 스트라빈스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가장 입술 자국이 컸던 사람은 역시 레너드 번스타인이다. 번스타인의 <캉디드>는 스트라빈스키의 <탕아의 행각>을 온 세상의 여정으로 확대한 역작이다. 더욱이 번스타인은 멜로디를 쓸 능력도 있었다.
번스타인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2018년을 막 성대하게 보냈다. 번스타인 또한 모교 하바드 대학의 노턴 강연 연사로 나서 스트라빈스키를 옹호하기 위해 갖은 마성의 언어를 총동원했다. 《대답 없는 질문Unanswered Question》이라는 강연집에 대해서는 이 책에 더 이상 언급할 생각이 없다. 여러분이 아직도 목마르다면 다음 책을 기대하시길!
이런 생각 끝에 이팅겐 수도원을 나선 우리는 다시 깊은 스위스 숲 속에 발을 들여놓는다. 역시 폭풍의 여파로 아름드리나무가 수십 그루나 누워 있다. 아저씨 내외는 연신 탄식과 한숨을 쏟았다.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카스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숲으로 들어가는 사냥꾼 그림이 떠올랐다. 저 안에 들어가면 멜로디가 있을까?
이날 숲 속에서 특별한 멜로디는 찾지 못했다. 오후엔 안델핑겐 궁전 공원에 들렀다. 벌써 여러 차례 왔던 시골 고성이다. 모차르트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표지도 서 있다. 다른 계절에는 풀꽃이 만발하지만 지금은 땅속에서 생명이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저승의 왕비 페르세포네가 남편 하데스를 떠나 어머니 데메테르를 만나러 지상으로 올 때, 곧 잔인한 4월이 되면 다시 푸르름을 찾게 되리라.
성 바로 옆에는 마을 묘지가 있다. 인구가 많지도 않지만 공동의 묘를 조성해 일정기간 추모한 뒤에 다시 후손의 묘로 쓰기 때문에 늘 같은 크기이다. 아저씨 가족도 여기 묻혀 있다. 아주머니는 한국 부모 형제의 묘가 그리울 때 가끔 이곳 시댁 묘를 찾는다. 스트라빈스키의 만년작은 대부분 추모곡이거나 죽음과 연관이 있다.
<딜런 토머스를 추모하며>, <J. F. K 비가>, <트레니: 예레미야 애가>, <레퀴엠 칸티클> 등이 그것이다. 이때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이 사용되기도 한다. 안델핑겐 공원묘지의 비석들도 스트라빈스키의 비가들처럼 각양각색의 삶을 요약한다. 아주머니는 시댁 식구들이, 비석을 나무로 세워달라고 했던 시어머니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돌비석을 세운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베네치아의 인공섬에 조성된 산 미켈레 묘지에 다시 가면 나도 스트라빈스키에게 묻고 싶다.
친애하는 이고리 표도로비치, 당신의 멜로디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스트라빈스키 선생님, 스스로 지은 선율은 어디에 두셨죠?
스트라빈스키는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늘 채워주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 나는 다시금 안데르센의 통찰에 공감한다.
지성과 의지를 가장 큰 무기 삼아 낡은 것들을 깨부수는 작곡가, 그가 바로 바그너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가지고 있는 신성함은 바그너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스트라빈스키에게도 그런 신성함을 찾아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신성함! 나는 베토벤이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직 음악이 종교의 울타리에 걸쳐 있던 베토벤까지가 숭고한 감동을 주는 음악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낭만주의라는 달콤한 유혹으로 넘어온 이후, 뜨거운 눈물은 말라버렸다.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 가운데 게르다의 착한 눈물을 흘려준 사람은 차이콥스키 정도가 아닌가 싶다. 내가 아무리 브람스와 슈트라우스, 푸치니와 말러에 빠져든다 해도 그것은 지적 유희의 클라이맥스를 가져다 줄지언정 체념을 통해 스스로 가치를 발견하는 감동을 느끼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보름 넘게 스트라빈스키의 발자취를 떠난 여행을 이렇게 자조적으로 마무리할 것인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왜 스트라빈스키인가? 결국 그의 음악이 선배들이 도달했던 예술적인 숙련도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가로서 최고의 음악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를 듣는 것이다.
중세가 만든 두터운 교회 건축 위로 그만큼 위압적인 다성음악이 완성되었다. 그때 조스캥 데프레는 ‘무장 남자L’homme armé’라는 세속 가요 선율을 가지고 미사곡을 만들었다. 위대한 다성 음악가 팔레스트리나는 자신의 시대가 가고 몬테베르디라는 달달한 선율 작곡가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바흐는 가장 진지한 대위법의 산물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역시 당대 민중의 입에 오르내리던 세속 가요 ‘순무와 배추Die Wasserrüben und der Kohl’로 마무리했다. 순무와 배추로만 끓인 수프에 질린 사냥꾼이 고기 맛 좀 보게 해달라고 투정하는 내용이다. 바흐는 가장 소박한 재료로 자기 재능의 극대치를 완성한 것이다.
로시니의 경박한 오페라와 경쟁해야 했던 베토벤 또한 <디아벨리 변주곡>에 모차르트의 유명한 가락을 인용해 바흐에 경의를 표한다. 주인 돈 조반니의 방탕한 연애 행각을 늘어놓는 하인 레포렐로의 노래이다. <세비야의 이발사>로 모차르트의 후계자임을 내비친 로시니에 대한 처절한 저항으로 들린다.
때문에 스트라빈스키가 반독일 친이탈리아 프레임을 설정한 것은 탁월한 아이디어였다. 그는 가장 뛰어난 청중의 눈높이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불새>의 피날레는 브람스의 어느 교향곡의 클라이맥스에 비겨 부끄럽지 않다. <봄의 제전>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이래 가장 강렬한 리듬의 혁명이지 않은가! <결혼>으로 완성된 자기 미학은 그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아류가 아님을 보여준다.
신고전주의의 개시라고 평가되는 <풀치넬라>는 역설적으로 차이콥스키에 대한 화답이었다. 차이콥스키가 이미 고전주의 음악을 가지고 <로코코 변주곡>과 관현악 모음곡 <모차르티아나>를 썼으니 말이다.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오페라 <욜란타>는 신고전주의의 백미이다. 스트라빈스키 최고 걸작 <오이디푸스 왕>의 비장미가 베르디의 <운명의 힘>, <돈 카를로>, <오텔로>만 못하지 않다. 심지어 그 모티프는 <아이다>로부터 온 것이다.
만년의 작품 <난봉꾼의 행각>, <칸타타>, <미사>, <아곤>은 라이벌이었던 쇤베르크의 기법마저 재료로 만든 것들이다. 가장 무릎을 치게 하는 것은 매 시대 다른 듯했던 이 음악들 모두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맥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시편 교향곡>이나 <아곤>과 같이 정서적으로 시기적으로 멀리 떨어진 곡에서도 <봄의 제전>과 <병사 이야기>의 혈관을 흐르는 피가 이어진다.
참전 여부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느냐를 따지기 앞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의 호사이다. 자기 소임을 다한 음악가는 어떤 비판도 달게 받을 자격이 있다. 그는 남을 비판하는 입장이 아니라 비판을 감내해야 하는 선택받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낭만주의라는 예술사의 가장 압도적인 시기가 마무리되어가는 20세기 벽두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것은 차이콥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라는 러시아 음악의 두 거인이 벌인 경쟁의 산물이기도 했다. 세르게이 댜길레프라는 인형극 장인의 시나리오에 맞춰 준비된 인형들이 파리 공연을 성공리에 이뤄냈다. 미하일 포킨, 바츨라프 니진스키, 알렉산데르 브누아, 니콜라이 레리흐, 피에르 몽퇴와 같은 배역이 이 인형극에 함께 출연했다.
머지않아 자기 처지를 알게 된 스트라빈스키는 줄을 끊고 스스로의 인형극을 시작했다. 그 아래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조지 발란신, WH 오든과 같은 인형들이 차례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때 그는 전에 보지 못한 강력한 경쟁 인형극들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찰리 채플린과 월트 디즈니라는 새로운 장르의 거인들이었다. 일정 부분 경쟁하고 또 협력하며 이 인형극은 지금까지 세계 극장을 지배해 왔다. 오늘날 벌어지는 많은 인형극은 세 사람의 모델로부터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 갈망하면 할수록 목마름만 더해지는 것이다. 후어의 강물을 다 마신다고 해도 채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와 점심을 먹고 취리히 공항에서 부부의 환송을 받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약 3주 동안 스트라빈스키를 찾아 떠난 여행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스트라빈스키 자신이 <불새>의 운 좋은 이반 왕자이자, <페트루시카>의 어릿광대, <봄의 제전>의 선택된 자, <병사 이야기>의 조셉, <난봉꾼의 행각>의 톰 레이크웰이었던 것이다. 그는 발랄한 파우스트인 동시에, 진지한 돈키호테였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에 소개한 이야기들을 읽고 그의 음악을 들으며 나처럼 흥분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