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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n 22. 2020

편지의 장면

차이콥스키, 예브게니 오네긴 (2)

푸시킨 소설의 제목은 <예브게니 오네긴>이지만, 같은 이야기로 쓴 차이콥스키의 오페라는 <타티아나>라고 불러야 옳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시종일관 무대를 장악하는 사람은 오네긴이라기보다는 타티아나이다. 그녀가 오네긴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은 오페라 전체의 핵심이자, 러시아 음악의 보석과도 같다.


푸시킨의 소설에서 타티아나의 편지는 번역이다. 타티아나는 모국어로 연애 감정을 적는 데 익숙칠 않았기에 불어로 썼다. 대. 단. 하. 다! 토마스 만이 <마의 산>에서 한스 카스토르프와 쇼샤 부인이 나누는 대화를 불어로 쓰고 번역도 안 해준 것과 달리(불어를 모르는 사람은 주석을 봐야 하지만, 우리말 번역본으로 보면 구분이 없다), 푸시킨은 애써 러시아말로 번역해 줬다. 물론 러시아말을 모르는 나는 우리말 중역으로 읽었다. 자신의 편지 번역을 푸시킨은 이렇게 묘사한다.

그것은 소심한 소녀의 손가락에 처분을 맡긴 <마탄의 사수>!

왜 하필 <마탄의 사수>인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는 <무도회의 권유>를 쓴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다. 소심한 소녀에게 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참담해질지도 모른다. 더욱이 <마탄의 사수>는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악마의 총알 이야기이다. 오페라에는 연인이 악의 길로 빠지지 않고 선의 힘으로 자신을 택해주기를 바라는 소녀의 기도가 나온다(Wie nahte mir der Schlummer). 푸시킨의 수준이 이만저만 높지 않다.

서른 살의 니나 스테메. 스무 살 아가테를 갈망한다

차이콥스키로서는 또 하나의 숙제를 받은 셈이다. 그는 소녀가 밤새워 쓴 연애편지를 작곡하면서 베버의 긴 아리아와 경쟁해야 한다. 베버도 7분이 넘는 긴 곡이지만, 차이콥스키는 그 두 배로 썼다. 꼴딱 밤을 새워서 쓴 편지이니 그 정도도 짧다.

일단 인색한 메트로폴리탄의 발췌를 들어보자

이 곡을 처음 듣는 사람의 반응은 십중팔구 베버를 망친 소심한 소녀, 아니 극 중 타티아나와 같다. 다행히 우리는 푸시킨이나 차이콥스키의 시대가 아니므로 듣고 또 들어 따라 부를 수 있다. 이 곡만 외우면 오페라의 절반은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막을 여는 전주도 여기서 왔고, 뒤에 처지가 바뀐 오네긴이 오열할 때도 타티아나의 멜로디를 노래한다. 차이콥스키 <예브게니 오네긴>의 도처에 ‘타티아나’의 아우라가 감도는 것이다.

타티아나의 명명축일을 여는 간주곡도 편지의 기운이 감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아내 갈리나 비시넵스카야나 만년에 이 역을 즐겨 부른 미렐라 프레니는 원숙한 여인상이다. 많은 오페라 배역이 성악가가 전성기를 맞을 때까지, 심지어 이력의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주곤 했지만, 청중은 타티아나를 실제 나이로 만나고 싶은 조바심을 느낀다. 오늘날 아스미크 그리고리안이나 예카테리나 곤차로바와 같은 소프라노가 정상의 무대에서 30대 타티아나를 열연한다. 이들이 4, 50대에 여전히 이 역할을 주요 레퍼토리로 꼽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아스미크 그리고리안은 오히려 자신이 “타티아나를 부르기엔 너무 드라마틱하다”라고 고백한다. 많은 극장이 자신에게 그 역을 맞추지만, “실제로 타티아나는 훨씬 나비 같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게감 그리고리안과 이레나 밀케비치우테의 딸이다

20대 타티아나를 기대하는 것은 과욕이 아니다. 1879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 지휘로 이 곡이 초연되었을 때 마리아 클리멘토바 무롬체바가 소녀를 불렀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23세였으니 타티아나로 이상적이었다. 1888년 작곡가가 직접 지휘한 프라하 국립 극장 공연 때는 19세의 베르타 푀르스트로바 라우테레로바가 여주인공을 불렀다. 차이콥스키는 그녀가 “꿈속에서도 그리지 못했던 타티아나”라고 극찬했다.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 음악원의 성악도가 이 나이에 타티아나로 이름을 알린다면 차이콥스키의 똑같은 찬사를 들을 것이다. 그만큼 갈망하는 쟁쟁한 선배들을 제쳐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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