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준호 Jun 23. 2020

대륙의 스케일

차이콥스키, 예브게니 오네긴 (3)

예브게니 오네긴의 무대는 어디인가? 주인공 오네긴은 숙부의 유산 상속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숙부의 시골 영지에서 라린 가족을 만나 맏딸 타티아나에게 구애를 받는다. 세월이 지나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타티아나는 오네긴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재회한다. 그러면 타티아나의 고향이 어디인지가 남는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푸시킨은 21세에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해 격찬을 듣지만, 그 직후 급진적인 활동으로 유배나 다름없는 전근을 간다. 캅카스, 크림 반도, 카미안카, 몰도바의 키시나우(러시아말로 키시뇨프), 오데사에서 4년을 보낸 그는 미하일롭스코예 외가에서 2년을 더 지내다가, 사면받고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지도로 보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키시나우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8년 동안 집필했다. 사실상 소설의 배경은 언급한 많은 지역 모두이다. 제2장 다섯 번째 소네트는 숙부의 영지에 도착한 오네긴이 사람들을 피하며 손가락질받는 모습을 그렸다. 그는 누가 찾아오는 소리가 나면 뒷문에 ‘돈 강 지역 종마’를 대령시켰다. 모스크바 남동쪽에서 발원한 돈 강이 세를 이루는 곳은 흑해로 흘러드는 하류이다. 돈 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돈 코사크 부족을 떠올리면, 그 종마가 어떤 모습일지는 쉽게 연상된다.


<예브게니 오네긴> 제5장 서른두 번째 소네트는 타티아나의 명명축일 잔칫상을 묘사한다. 프랑스와 러시아 식이 절충된 식탁에 ‘돈 지방 포도주’를 빠트리지 않았다. 흑해 연안 와인은 유명하다. 몰도바는 옛 소련 최대 와인 산지였고, 조지아는 인류 최초의 와인 생산지로 유네스코가 공인했다. 모두 푸시킨이 거쳐간 곳이다.

푸시킨의 외가 미하일롭스코예는 발틱 삼국에 면한 프스코프 주에 속한다. 소로트 강이 흘러드는 쿠차네 호숫가에는 푸시킨 박물관이 있다. 작가는 이곳에 머물 때 엘리자베타 보론초바 총독 부인에게 연애편지를 썼고, 역시 다른 사람의 아내였던 안나 케른과도 교재 했다. 많은 연애 대상 가운데 한 사람에게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시 ‘놀라운 순간을 기억합니다’는 글린카가 가곡으로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갈리나와 캅카스가 고향인 슬라바 부부

오네긴과 같은 ‘연애 도사’이던 푸시킨은 결국 모스크바로 돌아와 만난 장안의 미녀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결혼했다. 그 직후 소설은 완성되었다.


푸시킨의 여정과 개인사는 소설을 오페라로 옮긴 차이콥스키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다. 차이콥스키는 1877년 5월 볼쇼이 극장 콘트랄토 엘리자베타 라브롭스카야로부터 푸시킨의 걸작을 오페라로 써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차이콥스키는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해 음악으로 옮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작곡은 운명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아홉 살 어린 콘스탄틴 실롭스키의 도움으로 일에 착수했다. 실롭스키는 다방면에 재주꾼이었다. 특히 그는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가 볼쇼이에서 공연될 때 거대한 ‘머리’의 조각을 고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가 그로부터 받은 도움은 초고에 불과했다. 그는 누구보다 푸시킨을 잘 알았고, 그것에 음악을 붙일 유일한 사람이었다.


작곡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바로 타티아나의 편지 장면을 쓰는 중에 차이콥스키는 편지를 받는다.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이던 안토니나 밀류코바로부터 받은 열렬한 연서로 차이콥스키는 오페라를 더욱 숙명으로 여긴다. 그는 한 달 만인 7월 초에 밀류코바와 결혼했다.


다시 한 달 만에 신혼의 단꿈은 끝났다. 그는 8월 초 여동생 알렉산드라 내외의 카미안카 집으로 떠나 6주 동안 그곳에 머물며, 교향곡 4번과 <예브게니 오네긴>을 계속 작곡했다. 카미안카는 앞서 현악 사중주 1번과 교향곡 2번 등을 썼던 익숙한 곳이며 뒷날 <오를레앙의 처녀>, <현을 위한 세레나데>, <1812년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따위의 걸작을 쓴 곳이었다. 무엇보다 푸시킨이 유배 중에 이곳에 머물렀다. 카미안카는 두 위인을 한 박물관에 기린다.

9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차이콥스키는 스위스로 떠났고, 제네바 호숫가 클라랑스에서 오페라 1막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했다. 11월에 베네치아에서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2막 1장을 마쳤다고 썼고, 1878년 1월 지중해 산 레모에서 3막을 끝냈다. 2월 초 그곳에서 완성된 전작은 모스크바로 돌아와 수정을 거친 끝에 1879년 3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초연된다.

현재로서 가장 이상적인 타티아나가 제네바 호반에서 부른 편지의 장면

1969년에 나온 소련 영화 <차이콥스키>는 <예브네니 오네긴>의 작곡 장면을 매우 인상적으로 그렸다. 떠들썩한 술집에서 ‘편지 장면’을 쓰며 만족하는 차이콥스키는 자작나무 숲을 지나며 같은 멜로디가 뒷날 오네긴에게 불릴 것을 예감한다. 집에서 피아노로 편지를 노래하던 차이콥스키는 둘도 없이 친한 하인 알료샤에게 어느 부분이 좋은지 묻는다. 알료사의 수줍은 의견은 작곡가를 크게 만족시킨다.

당신은 수호천사이신가요?
아니면 교활한 유혹자이신가요?

알료사는 밀류코바라는 여인에게 온 편지를 주인에게 전한다. 차이콥스키는 곧바로 자신이 오네긴이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니 그는 오네긴과 달리 행동해야 했다. 밀류코바 집 앞에서 그녀가 추물인지 미인인지 훔쳐보던 주인과 하인은 불순분자를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에 잡힌다. 연행한 사람이 저명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차이콥스키’임을 확인하고서야 경찰서장은 두 사람을 풀어준다. 결혼식을 마친 차이콥스키의 머리엔 교향곡 4번의 울림이 가득하다. 폰 메크 부인에게 헌정할 첫 곡이다.

1989년 호암아트홀을 졸음으로 초토화시켰던 문제작을 제작사가 공개해 버림
매거진의 이전글 편지의 장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