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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n 21. 2020

무도회에서 생긴 일

차이콥스키, 예브게니 오네긴 (1)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운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은 러시아 문학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푸시킨은 38세에 비운의 결투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완성한 이 소설로 불멸이 되었다. 20세기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영어로 남긴 유명한 번역과 주석은 네 권 분량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러시아 문예학자 유리 로트만의 주요 저작도 푸시킨과 <예브게니 오네긴>에 대한 연구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그러나 <예브게니 오네긴>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석이자 주석은 작가가 죽고 40년 뒤에 완성된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동명 오페라이다. 운문 <예브게니 오네긴>이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것처럼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이야말로 그의 전작 가운데 핵심이며, 러시아 음악의 결정적인 한방이다. 이 곡을 통해 러시아는 서유럽이 오랜 세월에 걸쳐 얻은 성과를 단박에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나도 따라잡을 테다

로트만은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에서 ‘무도회’라는 코드에 한 챕터를 할애한다. 사교의 시작이자 끝인 무도회는 ‘결투’, ‘카드게임’과 더불어 러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다. 로트만은 푸시킨이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무도회 장면을 통해 등장인물의 변화무쌍한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했음을 잘 지적한다.


무도회는 ‘멜로드라마’이다. 정해진 각본에 따라 참석자가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파티를 연 귀부인은 자신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화려한 인맥을 초대한다. 주인공은 혼기 찬 처자이다. 그녀는 유력 가문의 상속자일 수도 있고, 몰락 귀족 집안의 미녀일 수도 있다. 때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젊은 근위병 중위가, 때로는 산전수전 다 겪은 퇴역 노장이 그녀에게 청혼한다. 양가를 오가느라 바쁜 매파가 빠지지 않고, 부스러기라도 주어 담으려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따위에서 온 댄디가 기웃거린다. 엉뚱한 돌발상황 또한 늘 예고된, 틀에 박힌 촉매이다. 그것은 일을 되게 하기도, 그르치기도 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왈츠 장면

멜로드라마가 그렇듯이 무도회도 결국 ‘짝짓기’의 양식화된 포장이다. 봄이 겨울을 몰아내듯이, 꽃이 나비를 기다리듯이, 무도회는 생식의 시작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프랑스 궁정에서 유래한 모음곡 양식을 통해 무도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 슈베르트도 많은 춤곡을 썼지만, 그것을 정말 춤으로 만든 사람은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이다. 돔마이어를 비롯한 빈의 많은 무도장이 양식화된 ‘인간시장’이었다.

무려 홈시어터! 하지만 나는 더 화질 좋은 한글 자막판 소장자이다

러시아에서 푸시킨이 이를 간파했고, 차이콥스키는 바흐에서 슈트라우스에 이르는 독일 음악의 모델을 오네긴에 접목했다.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왈츠’와 ‘마주르카’, ‘폴로네이즈’를 알면 나보코프나 로트만을 읽지 않아도 된다.


푸시킨의 5장은 여주인공 타티아나의 명명축일을 그린다. 성년이 되는 처녀의 명명축일에는 큰 파티가 열린다. 카드게임과 티타임이 끝난 뒤 마침내 무도회가 시작된다. 허영심을 자극하며 서로 간을 보는 왈츠, 발정난 종마의 안달하는 모습 같은 마주르카, 마지막으로 짝짓기의 완성인 코티용이 이어진다. 두 쌍의 주인공 네 사람은 엇갈린 선택과 짓궂은 일탈 때문에 파국에 이른다. 두 꿀벌이 한꽃 안에 들어가 싸우다 하나가 죽은 결과, 남은 셋의 운명은 완전히 바뀐다. 이 또한 뻔한 멜로드라마의 소재일 뿐인가? 차이콥스키가 만지면 다르다!

왈츠가 쏘아 올린 대포

타티아나를 차 버린 오네긴이 자신의 약혼녀와 ‘왈츠’를 추는 것을 보고 속이 뒤집어진 렌스키는 그들이 ‘마주르카’마저 추어 보이자 폭발 직전이 된다. 권총의 방아쇠는 망할 남녀가 ‘코티용’까지 춘다고 할 때 이미 당긴 것이나 다름없다. 로트만은 푸시킨 당대 루도비크 페트롭스키의 말을 인용한다.

그 춤은 남녀가 상당히 밀착하며 회전하기 때문에 서로가 너무나 가까이 붙어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이 춤추기 위해서는… 지속적 주의가 필요하다.

왈츠가 뭔지 아는 사람에게는 하나마나 한 소리이다. 더욱이 모르는 사람과 공공연하게 살을 맞대기 위해 얼마나 어렵게 고안한 자리인데… 주의 따위는 사치이다! 다 알고 하는 말일 게다.

마주르카

차이콥스키는 파국의 ‘마주르카’를 무도장에 넣어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코티용’을 출 차례입니다.”

‘코티용’까지 가기 전에 ‘마주르카에서 사달이 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양해는 구해야 도리이다

<예브게니 오네긴> 3막은 세월이 흐른 뒤 상트페테르부르크 무도회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번에는 무도회의 시작곡인 ‘폴로네이즈’가 제대로 나온다. 일찍이 바흐가 관현악 모음곡 2번에서 플루트에게 맡겼고, 헨델은 합주 협주곡에서 폴란드풍을 보여줬다.

이 똘끼 충만한 이탈리아 정원사들이 헨델을 진짜 민속음악으로 만들었다

물론 폴로네이즈의 완성은 쇼팽이다.

쇼팽의 친구 크비아토콥스키가 그린 <쇼팽의 폴로네이즈>: 필요한 사람이 다 모였다

차이콥스키의 ‘폴로네이즈’는 단독으로 콘서트나 축제의 시작을 여는 당당한 음악이다. 푸시킨의 원작에는 없는 장면이다. 시간과 장소의 변화를 환기하며, 시골 명명식 축일에는 마땅치 않았을 폴로네이즈의 휘황찬란한 장관을 보여준다.

여기도 참석 완료!

18세에 이미 ‘연애의 장인’으로 이곳을 주름잡던 오네긴에게는 익숙한 장소였지만, 26세가 된 지금은 달랐다. 낯선 기품 있는 부인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녀를 달라 보이게 했건 간에 차이콥스키는 오네긴의 혼비백산한 머릿속을 관통해 보여준다. 바흐나 헨델의 폴로네이즈로는 이런 상황을 묘사할 수가 없다. 심지어 쇼팽으로도!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다 - 블라디미르 렌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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