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안 스스로 음악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그와 크레츠마르 선생의 개인 수업은 날이 갈수록 깊이를 더해갔다. 크레츠마르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독서가 건강을 해칠지 모른다는 세레누스의 걱정을 오히려 견제한다. 수업을 통해 아드리안은 음악가 개개인에 대해, 통시적인 음악사에 대해, 그리고 여러 작곡가 상호 간에 주고받은 영향에 대해 깊은 통찰을 얻는다. 크레치마르는 구노가 슈만에게서 물려받은 것, 세사르 프랑크가 리스트에게 물려받은 것, 드뷔시가 무소륵스키에게 의지했던 것, 그리고 댕디와 샤브리에가 어떻게 바그너를 이어받았는지 설명했다. 이는 곧 프랑스 음악이 독일 음악으로부터 얼마나 큰 빚을 졌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많은 것을 이해한 아드리안은 특히 다성음악(수직적인)과 화성음악(수평적인)의 대립과 긴장 관계의 해소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아드리안의 생각은 음악이 세상을 관념이 아닌 실체로서 모방한다는 데에까지 미쳤고, 이는 마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상』을 읽지 않고 쇼펜하우어에 도달한 것과 같다. 음악에 대한 아드리안의 지대한 관심에 비추어 다음에 잇따르는 냉각기가 더욱 역설적으로 보인다.
김나지움 졸업반의 아드리안은 히브리어에 열중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그가 신학에 뜻을 두고 있음이 드러났다. 학문의 여왕인 철학을 넘어서, 그 철학조차 시녀쯤으로 여기는 신학이야말로 아드리안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반겨마지 않을 선택이었다. 그러나 세레누스는 누구보다 아드리안을 잘 알기 때문에 아드리안의 본성인 ‘오만함’이 결코 만만하게 신학과 병존하지 못할 것을 짐짓 우려한다.
아드리안은 음악이 아닌 신학을 택한 결과를 두고 크레치마르가 실망하지 않도록 잘 얘기하겠다고 말한다. 결국 세레누스는 아드리안이 신학을 택한 것은 무의식적으로, 음악이 세속화됨으로 해서 떠안게 된 과도한 짐을 내리고 다시금 예전과 같은 소박한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드리안은 유서 깊은 할레 대학 신학부에 들어갔고, 예나(Jena)와 기센(Gießen)에서 공부하던 세레누스도 합류해 두 해를 함께 배우게 된다. 세레누스는 인문주의 부활 시기에 할레가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유해한 신학 논쟁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경건주의 교회개혁이 소멸되어 가는 교회 권위를 불필요하게 되살리는 것이라고 여겼고, 오히려 개인의 순수한 신앙과 종파에 얽힌 현실 종교를 구분한 슐라이어마허에 끌렸다. 세레누스는 반대로 종교의 신비주의를 진보 윤리로 대체하려한 ‘자유신학’이 인간에 내재한 마성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생(生)의 철학’과 ‘비이성주의’가 신학과 결합했을 때 악마의 학문으로 변질될 우려를 엿본다.
세레누스는 아드리안과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싶었지만, 친구는 의도적으로 외면했고, 그 점에서는 아드리안이 가입한 기독교 청년 동아리 ‘빈프리트’(Winfried)의 회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토마스 만은 명백히 빈프리트라는 이름을 바이로이트에 있는 바그너의 사저 ‘반프리트’(Wahnfried)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뒷날 히틀러의 총애를 받는 바그너의 며느리는 비니프레트(Winifred)라는 이름이다.
신학에 대한 아드리안의 태도가 어떻든 간에 세레누스는 모든 것이 고향 카이저스아셔른의 신비롭고 복고적인 자장(磁場) 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드리안은 할레 대학 신학도로 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하숙집 창에서는 이 도시에서 태어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의 동상이 보였다. 그는 피아노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위로 고물상에서 산 동판화를 부적처럼 걸어두었다. 그것은 뉘른베르크 태생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가 그린 그림 <멜랑콜리아 I>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마방진(魔方陣)이었다. 가로 세로 네 칸으로 된 표에 1부터 16까지의 수를 배열한 마방진은 어느 방향으로 더하거나 그 합이 서른넷이 되었다.
뒤러의 그림은 안톤 베베른(1883-1945)이 12음 기법으로 작곡한 <아홉 악기를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9 Instruments, Op. 24>에 써 넣은 마방진을 떠올리게 한다. 폼페이 폐허에서 발견된 석판에 새겨진 문구는 "농부는 자신의 쟁기를 일의 형식으로 사용한다"는 뜻으로, 어느 방향으로 읽거나 같다.
아드리안의 스승 가운데 계통학을 강의하는 에렌프리트 쿰프 교수가 언급된다. 쿰프는 원래 괴테와 실러의 작품을 줄줄 외울 정도로 고전문학에 정통한 학자였으나 바오로 사도의 복음을 읽고 신학자가 되었다. 근대의 산물인 인문학으로부터 중세의 산물인 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 인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