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니의 작은 장엄미사와 리스트의 페트라르카 소네트
귀도 다레초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업적이 두드러진 아레초이지만, 그 밖에도 이곳은 르네상스 화가 조르조 바사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가 살던 집은 박물관으로 개방되었다. 앞서 보았듯이 그는 우피치 미술관을 지었고,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쓴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바사리는 획을 그을 만한 걸작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당대 예술가로 드물게 어엿한 집을 남긴 것만 봐도 사회적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교황과 메디치가의 신망을 얻었고, 아레초 유력 가문의 사위였던 그였기에 많은 곳을 여행하며 예술가들과 친교를 쌓고 그들의 작품을 평가했던 것이다. 그런 친화력을 가진 바사리도 꺼려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벤베누토 첼리니이다. 피렌체 태생의 첼리니가 아레초에서 난 바사리보다 열한 살 위이다. 미켈란젤로의 동향 후배인 조각가 첼리니는 스스로 최고의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미켈란젤로 또한 스스로 화가이기 전에 조각가라고 자칭했기 때문이다.
첼리니는 거기에 더해 피렌체 태생이 아닌 예술가를 한수 아래로 보았다. 요즘으로 치면 학연이나 지연을 따지는 꼰대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첼리니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단순히 그런 ‘연줄’이 아니었다. 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재능이었다. 그는 피렌체 태생의 조각가가 가장 뛰어난 예술가라는 믿음과 그에 따른 책임감을 가진 것이다.
여기에는 당대 예술가들 사이의 묘한 경쟁 심리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미켈란젤로는 1500년 전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권력을 잃었다가 다시 복권하는 과정에서 가문과 복잡한 애증 관계가 된다. 메디치 가문이 쫓겨났을 때 그가 만든 <다윗>이 공화정 승리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시 복귀한 메디치 가문은 <다윗>의 맞은편에 바르톨로메오(또는 바초) 반디넬리(Bartolommeo (or Baccio) Bandinelli, 1488-1560)로 하여금 <헤라클레스와 카쿠스>를 세우게 한다. 첼리니의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도 메디치의 영광을 기린 작품이다.
첼리니야 선배 미켈란젤로에 대한 존경심이 차고 넘쳤으니 문제가 없었지만, 반디넬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헤라클레스>는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조잡하다. 오히려 <다윗>이나 <페르세우스>와 나란히 있어 더욱 초라해 보일 지경이다. 더욱이 반디넬리는 미켈란젤로의 라이벌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친한 사이였다. 최악은 반디넬리가 조각한 대리석이 원래 미켈란젤로가 쓰려던 것이었고, 그것으로 만든 헤라클레스 또한 미켈란젤로가 구상한 삼손을 베낀 것이었다는 점이다. 첼리니는 <헤라클레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혹평했다. 쌍욕을 한 부분도 있다.
“헤라클레스의 머리털을 밀어버린다면 그 뇌를 담을 만큼의 충분한 두개골이 남지 않을 것이다. (중략) 헤라클레스의 발 하나는 지하에, 다른 하나는 뜨거운 석탄에 놓고 있는 것 같다.”
똑같은 일이 첼리니와 바사리 사이에도 벌어졌다. 바사리가 젊은 시절 로마를 찾았을 때 첼리니의 집에 묵은 적이 있었다. 피부병이 심하던 바사리가 자다가 더러운 손으로 남의 다리를 심하게 긁는 바람에 소동이 일어났다. 그 일로 사이가 좋지 않던 두 사람 관계는 만년에 파탄이 났다.
첼리니와 반디넬리가 시뇨리아 광장의 넵튠 분수(위 그림 4) 제작을 놓고 경합을 벌였는데, 중간에 개입한 바사리가 반디넬리의 편을 들었고, 반디넬리가 죽은 뒤에도 그 일을 젊은 바르톨로메오 암마나티가 맡도록 주선했다.
미켈란젤로가 죽었을 때 피렌체는 거장의 장례 위원회를 꾸렸다. 화가 조합의 대표는 바사리였고, 조각가 조합은 첼리니를 내세웠다. 그러나 첼리니는 병으로 누워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고, 바사리가 식을 주관했다. 미켈란젤로가 어찌 생각했을까?
만년의 첼리니는 동성애 혐의로 집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그때 쓰게 된 것이 바로 앞서 살펴본 <자서전Vita>이다.
바사리는 뒤에 쓴 <르네상스 예술가 평전>에서 첼리니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록했음을 지적하며 그를 짧게 언급한다.
그러나 당대에 동성애가 죄라면 미켈란젤로도, 심지어 여러 교황도 첼리니와 같은 벌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다음 세대 거장인 카라바조는 예술사 최악의 악동으로 꼽힌다. 그는 걸핏하면 시비가 붙어 싸운 끝에 살인을 저질렀고, 양성애에서 더 나아가 소아성애자이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사회격리’ 대상이었던 것이다. 성격파탄자였던 베토벤, 대상의 결혼 유무와 상관없이 본능에 충실했던 바그너, 그 못지않게 화려한 여성 편력을 보인 피카소나 스트라빈스키를 어찌할 것인가? 거기다 성소수자를 빼놓고는 아예 예술사를 논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인품으로 예술을 평가해야 한다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정도는 되어야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과오와 기행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뒷날 괴테가 첼리니의 자서전을 번역할 때 그의 치부를 가렸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삶에 정직했고, 뒷날 사람들이 자신의 예술을 평가할 때 살아온 행적 때문에 판단을 유보하지 않길 바랐다.
그것이 바로 19세기 독일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주문이다. 역사를 평가하려 들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직접 기록하면서 첼리니와 같은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 ‘20세기 음악의 아이콘’이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직접 쓴(사실은 대필이다) 자서전에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해 전 음악사를 동원한다. 알버트 슈바이처 또한 <나의 생애와 사상>, <물과 원시림으로부터>라는 대표적인 자서전을 통해 스스로 신화가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고기 수프를 먹는 목사의 유복한 아들이, 뒷날 길이가 짧아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를 입고 눈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다는 성장기. 노벨상을 수상하러 갈 때 4등 칸이 없어서 3등 칸에 탔다는 식의 소박한 서민 연출. 고양이를 안고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는 생명 경외 의사. 이런 따위의 포장은 슈바이처를 ‘적도의 성자’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슈바이처의 이야기 가운데 이 한 가지를 놓칠 수 없었다. 젊은 시절 슈바이처는 남독일의 오버아머가우(Oberammergau)를 여행했다. 이곳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예수 수난극을 무대에 올리는 전통이 있었다. 그는 원래 종교적인 목적으로 소박하게 시작했던 이 수난극이 외지 사람을 위한 관광 상품이 되면서 화려한 무대 장식과 저속한 음악이 버무려진 것으로 변질되었음을 아쉬워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슈바이처가 묘사한 자신의 삶은 잘 만든 연출이었을까, 소박함으로 돌아가고자 한 안간힘이었을까?
이상이 아레초에 있는 바사리의 호젓한 정원에 앉아 내가 한 생각이다.
음악 얘기는 없이 왠 한없는 미술 타령이냐고 하실 분께 기가 막히게 좋은 선물이 있다.
미켈란젤로가 안장된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는 로시니의 무덤도 있다. 로시니는 일찌감치 오페라 무대를 떠나 파리에 칩거하다가 <만년의 과오Péchés de vieillesse>을 내놓았다. 마치 첼리니를 의식한 것처럼 겸손한 제목이다. 150편의 성악과 실내악, 피아노 독주곡들을 담은 이 작품집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작은 장엄 미사Petite messe solennelle, 1863>이다. 로시니는 다음과 같은 서문을 달았다.
“자비로운 하느님, 이 보잘것없는 미사를 굽어보소서! 제가 막 완성한 이 곡이 진정 신성한 음악입니까, 아니면 빌어먹을 작품입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희극 오페라 작곡가였습니다. 재주는 없고 열정만 있을 뿐입니다. 부디 축복을 내리시어, 천국에 들게 하소서!”
나폴레옹 3세는 이 곡이 장엄하지도 교회음악 같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장엄미사’라는 제목은 1855년에 나온 샤를 구노의 <성 세실리아의 장엄미사Messe solennelle en l’honneur de Sainte-Cécile>를 비꼰 것이다.
로시니가 보기에 구노는 지나치게 감정과잉으로 흘렀다. 자신의 독창적이고 간결한 구상을 잘 표현하기 위해 로시니는 <작은 장엄미사>를 네 독창자와 다시 각 파트를 두 명씩 배정하는 합창으로 총 열두 명이 노래하도록 구상했다. 반주는 두 대의 피아노와 하르모늄만을 사용했다.
당시 파리에는 바흐 전집 악보의 수정판이 새로 출판될 예정이었다. 로시니는 예약 구매자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고, 바흐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그의 작품에 선명하게 영향을 미쳤다. <작은 장엄미사>의 ‘사도신경 Credo’과 ‘거룩하시다Sanctus’ 사이 봉헌식 중에는 피아노와 하르모늄이 ‘종교적인 전주곡Preludio religioso’(위 영상 55:47)을 연주한다. 이 곡은 바흐의 건반을 위한 토카타와 같은 분위기로 엄숙하게 시작해, 판타지아풍의 악상을 대위법과 같이 전개해 나간다.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한 악장을 듣는 것과 같이 깊이 있고 현실을 초월한 세계를 지향한다.
로시니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가 이 작품을 어설프게 관현악으로 편곡할까 걱정해 1866년부터 1867년 사이에 오케스트레이션을 마쳤다.
로시니는 1868년 11월 13일 파리 파시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고, 일찍이 벨리니와 쇼팽이 묻힌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로시니가 편곡한 그의 ‘마지막 과오’는 석 달 뒤인 1869년 2월 28일에 파리 테아트르 이탈리앙에서 초연되었다. 로시니의 유해는 1887년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갈릴레오, 단테, 마키아벨리, 미켈란젤로가 안장된 곳에 함께 묻히는 영광을 안았다. 파리이거나 피렌체이거나 어느 쪽이든 그가 스스로의 과오를 부끄러워할 무덤은 아니었다.
바사리의 집에 앉아서 그를 혹평한 첼리니 생각만 하자니 미안하다. 그가 설계한 아레초 대광장의 바사리 로지아에 앉아 이 사연 많은 도시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우습고도 슬픈 이야기를 떠올린다. 바로 로베르토 베니니가 주연 감독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이다. 영화 속 그의 이름 또한 계명을 창안한 중세 음악가와 같은 귀도이다.
한쪽 귀가 안 들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는 귀도가 오펜바흐의 ‘뱃노래’를 들으며 ‘프린치페사’에게 마법을 걸었던 극장은 아마도 페트라르카의 이름을 딴 곳이리라.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 조반니 보카초(1313-1375)와 더불어 르네상스 3대 문호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는 이곳 아레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원래 피렌체 사람이었지만, 이곳으로 이주한 이유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가 하기로 하자.
페트라르카는 교황이 아비뇽으로 옮겼을 때 함께 갔다가 그곳에서 평생의 연인 라우라(Laura)를 처음 본다. 그가 갈고닦은 서정시집 <칸초니에레>는 대부분 라우라에게 바친 것이다.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였기에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절절하게 가슴에 사무친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가 이탈리아 여행 당시(1838-42)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세 곡을 테너와 피아노가 연주하도록 썼고 피아노 독주용으로도 편곡했다. 그는 1858년 <순례의 해 제2년: 이탈리아Années de pèlerinage Deuxième année: Italie>를 묶어 펴낼 때 이 세 곡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다시 1861년에 바리톤 독창이 노래하도록 손보았고 최 만년인 1883년에 출판되었다. 세 곡의 가사를 알면 절반은 아는 셈이 된다.
소네트 47번 ‘Pace non trovo’
나는 평화를 찾지 못하네 그러나 싸울 마음도 없지
두렵지만 희망이 있네 타오르지만 이내 얼음으로 변하지
나는 하늘로 솟구쳤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네
나는 아무것도 잡지 않지만 온 세상을 끌어안네
사랑이 나를 감옥에 가두었네 열리지도 굳게 닫히지도 않네
그는 나를 소유하지도 않으면서 포승을 풀어주지도 않네
그는 나를 죽이지 않고 쇠고랑을 풀어주지도 않네
나를 살리지 않으며 고통에서 구하지 않네
나는 눈 없이 보고 혀 없이 소리치네
나는 사라지고 싶지만 도움을 간청하네
나를 증오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네
나는 고통을 먹되 울고 웃네
죽음도 삶도 모두 나를 미워하네
내가 이 지경인 것은 나의 여인 그대 때문이오
소네트 104번 ‘Benedetto sia ’I giorno’
축복하노라 그 날 그 달 그 해
그 계절 그때 그 시간 그 순간을
그 사랑스러운 정경 내가 노예가 된 곳을
사랑스러운 두 눈으로 나를 묶어버렸지
그리고 축복하노라 첫 번째 달콤한 아픔을
사랑이 나를 집어삼켰을 때 고통받았지
또 나를 찌른 활과 화살을
마지막으로 내 가슴에 뚫린 상처를
축복하노라 울려 퍼진 많은 음성을
라우라라고 불렀을 때였지
한숨과 눈물, 갈망을
그리고 축복하노라 모든 손글씨를
그것으로 그녀의 됨됨이를 펼쳐 보였지
그녀로부터 나왔고 오직 그녀로만 향했던 내 생각들이여
소네트 123번 ‘I’ vidi in terra angelici costumi’
나는 지상에서 천사의 우아함을 보았네
비할 데 없는 천상의 아름다움도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또 아프네
무엇을 보았거나 그것은 꿈 그림자 안개이리
그리고 나는 그 사랑스러운 눈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보았네
오래도록 태양도 부끄럽게 했던 눈이 건마는
또 들리는 말들에 섞인 한숨은
산을 움직이고 강을 멈출 것만 같았지
사랑 지혜 용기 연민 고통은
그 슬픔 속에서 더욱 달콤한 음악이 되었네
지상에서 들을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달콤한
그리고 하늘은 그 화음에 집중한 나머지
가지 위의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네
그 달콤함이 대기와 바람을 가득 채웠네
아레초를 두고 어찌 떠날고! 내게는 피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