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사장은 늘 같은 모습 같지만, 사실은 단 한순간도 같은 적이 없다. 바람이 불면 모래결은 달라지고, 파도가 스치면 발자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위를 걷는 우리는 늘 무언가를 남기는 듯 보이지만, 결국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그 무상함 속에서 묘한 위안을 느낀다.
어릴 적에는 모래사장에서 뛰어놀며 성을 쌓았다. 한 땀 한 땀 쌓아 올린 작은 성은 파도의 한 번의 밀려듦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때는 허무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삶의 이치였다. 애써 만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고, 그럼에도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이미 배우고 있었던 셈이다.
모래사장을 거닐다 보면, 수많은 발자국이 겹쳐져 있다. 누군가는 혼자 걸었고, 누군가는 나란히 함께 걸었다. 파도는 그것을 지우지만, 지우기 전까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마치 우리의 기억과 같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일지라도, 그 시간을 함께한 사람에게는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는다. 우리는 흔적을 남기려 애쓰지만, 진정 중요한 건 남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살아냈다’는 사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모래사장에서 자주 ‘시간’을 떠올린다. 발자국이 지워지는 속도, 모래성이 무너지는 방식, 파도가 닿았다가 사라지는 흐름 속에서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게 흘러간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마치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매달리지만,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하기만 한 건 아니다. 순간의 소중함을 알고, 지금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태도가 아닐까.
또한 모래사장은 늘 새로운 출발을 알려준다. 지워진 발자국은 새로운 발걸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무너진 성은 다시 세울 수 있고, 파도가 닿은 자리는 언제나 새로운 모양으로 빛난다. 우리가 실패와 후회를 겪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는, 인생도 모래사장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젠가 내 삶이 지나가 버리더라도, 그 순간순간의 발자국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싶다. 비록 남들에게는 지워진 흔적일지라도, 내가 걸어온 길 위에서만큼은 충분히 의미 있었음을. 모래사장은 말없이 내게 그 진리를 가르쳐준다. 남지 않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발걸음을 어떻게 내딛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모래사장을 걷는다. 바람이 불어 흔적이 사라져도, 파도가 밀려와 모든 것이 무너져도 괜찮다. 그 모든 것이 삶의 일부이고, 그 안에서 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니까. 언젠가 이 길이 끝나더라도, 내가 걸었던 모래사장은 분명 내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