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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진 Apr 29. 2019

반년 퇴준생의 퇴사기

사직서 쓰기, 송별회 하기, 작별인사 하기

드디어 퇴사.


4.19 혁명의 날, 2019년 4월 19일, 6년 2개월간 일했던 직장을 때려치웠다.

내 퇴사의 이유는 이곳에선 내 인생의 미래를 꿈꿀 수 없어서, 직장의 특성상 정치적 이념에 좌우되는 일이 많아서, 내 온몸과 정신이 나쁜 독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아서.


때려치우는 과정은 아주 지난하고 길었지만, 좋은 이별을 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내 가장 어려운 시절 빛이 돼준 곳이었고, 인생에 길이 남을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줬으니까. 그리고 후회 없이 모든 일을 마무리했고,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도 아끼지 않았으니까.


퇴사 D-8
사직서를 쓰다


사직서는 애초에 채용과 면직을 담당하는 직원이 사인만 하면 되도록 작성해서 줬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이유로 2019년 5월 1일 자로 사직하고자 하오니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일신상의 이유? 물론 자발적 퇴사였지만, 일신상의 이유는 아닌데? 일신상의 이유라. 너네가 잘했으면 1년은 더 다닐라 그랬었다고.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남이 써준 사직서에 사인만 할 성격은 못 되는 나 자신. 그 사직서 초안을 받고 1주일 고민하고 사직서 문구 작성에 돌입했다.

내가 직접 쓴 사직서의 초안은 아주 공격적인 단어들이 배치됐었다. 이를 테면 '정치적 도구로 전락'. 오우 소름. 그 초안을 쓰고 또 고민했다. 이대로 낼 것인가 조금 고쳐쓸 것인가. 다시 고쳐 썼다. 정중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또박또박 다 하면서,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들을 수 있도록. 수많은 동료들이 직장을 잃었고, 대의를 위해서 개인의 행복을 짓밟는 너희를 위해선 일을 할 수 없다는 게 요지다. (내 마지막 콘텐츠가 4.19 혁명이었던 건 운명이었을까....^^)

과거의 순간을 후회해도 삭제하거나 수정할 수 없으니까. 그 순간에 내 마음에게 '정말 넌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묻고,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방법, 그걸 배우고 있다. 후회하지 않는다. 


퇴사 D-8 part 2
성과급 받을 수 있는 거죠?


작년에 재계약을 하면서 급여담당자의 실수로 성과급 319만 원을 받지 못했다. 급여담당자에게 재계약하면 못 받는 거냐고 묻자, 인사과에서 공문이 그렇게 왔다며 어쩔 수 없다고 말했었다. 이미 재계약 시 연봉 문제로 인사과와 한바탕 싸우고 난 뒤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싸울 힘도 없었다. 인사과에서 공문이 그렇게 왔다니, 급여담당자는 하루 이틀 하는 게 아닐 테니, 나 이전에도 이런 사례가 있었을 테니, 하고 믿은 게 잘못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일을 잘하지 않는데 말이야 ^^

그래서 나는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나서, 작년 못 받은 성과급과 올해 받아야 할 성과급을 일시불로 받아야겠다고 말했다. 친히 인사지침까지 보여주면서. 인사과에서는 급여담당자의 실수니 소급해서 지급하라고 했고, 나는 내일까지 그 결과를 받기로 했다.

참고로 내가 일했던 곳은 지자체였기 때문에, 규정과 규칙 등을 따지는 일로 피곤했다. 추경에 올려서 예산이 확보되면 준다느니, 그때 실수를 바로잡지 않은 것이 문제라느니 등등. 이런 말을 들으면 너무 심장이 빨리 뛰고 뇌에 산소가 없어지는 것 같다. 화가 나는 마음을 간신히 붙잡고, 한번 더 알아봐 달라고 말했다.

만약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면 나도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여러분, 인사과나 급여담당자를 믿지 말고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고 이왕이면 인사지침은 연도별로 업데이트하며 숙지하고 계세요.


퇴사 D-2
송별회, 건배사, 3차


송별회. 

안 하고 나갈 생각은 없었다. 퇴사하기까지의 기간을 길게 잡으면서 할 수 있는 건 다해보고 나가자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4월 17일 나의 송별회이자 새로 입사한 사람의 환영회가 열렸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주 높은 분이 오실 줄은 몰랐다. 우리 부서 전체 책임자. 심장이 또 나대기 시작. 손이 벌벌 떨리고 더러워진 내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필 횟집의 좁은 방이어서 사람들의 얼굴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나의 송별사 차례가 돌아오자 심호흡을 하고 떨리지 않는 척 일어섰다.


"모든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퇴사할 000입니다.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하고 싶어요. 그동안 제가 힘들 때 위로해주시고, 격려의 말을 건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무실에 같이 있다는,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고 감사했습니다. 제 퇴사의 가장 큰 이유는 (이 대목에서 호흡을 짧게 하고!) 제 인생을 생각했을 때 지금 퇴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제 미래를 위해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제 자발적 백수로 돌아가 제가 그동안 갈증을 느꼈던 일들을 하면서 앞으로도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최고 책임자 나으리께서) 오실 줄 모르고 멘트를 준비했는데, 그냥 하겠습니다. 직원들이 부끄럽게 일하지 않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사는 부끄럽게 살지 말 자로 하겠습니다. 부끄럽게! (다 같이) 살지말좌아!"


그 책임자는 나와 같은 대학 같은 과 출신이었다. 소주로 대작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결과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서 미련이 없다. 그날 와준 것에 감사한다. 내가 찾아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진작 자길 찾아와서 얘길 했으면 좋지 않았겠냐고 했지만, 그렇게 바뀔 조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뀌어도 문제가 많은 것이고.


아무튼 그날 또 다른 상사는 지금이라도 번복할 수 있으면 번복하자고 했고, 또 어떤 상사는 밖은 야생이고 여기가 따뜻한 곳이라고 했다. 그냥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인 내게, 사람들은 참 다양한 얘기를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사람들이구나, 난 작별인사를 했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송별사는 나의 마음과 동료들의 마음에 사이다를 들이부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정의하고 싶다. 송별회를 하게 된다면 꼭 속 시원히 하시길.


퇴사 D-1
퇴사 기념 떡입니당~
퇴사 떡을 담는 분주한 퇴사자의 손(ㅋㅋ)

퇴사하는데 사무실에 뭔가 돌리고 싶었다. 그동안 백일기념이다 승진턱이다 해서 얻어먹은 떡이 10kg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떡으로 정했다. 떡을 돌리자 "고생했다", "축하한다" 등의 메신저가 왔다. 딱 1번 말 섞어본 직원분이 장문의 메시지를 줬을 땐 좀 놀랐지만, 감사했다.

모두 내 퇴사 기념 떡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이게 무슨 떡인가요?"

"제 퇴사 기념 떡입니다"

"아.. 네? 아... 네...(어리둥절)"

퇴사 기념인 게 문제인 건지 퇴사할 사람이 떡을 주는 게 문제인 건지. 그냥 모르는 사람에게 떡 많이 얻어먹었으니까 돌린 건데! 다들 체하지 마시길.

퇴사 D-1 part2
나의 신입시절을 기억하는 이들과 송별회


꼬꼬마 시절에 나에게 밥 사준 사람들, 혹은 혼냈던 사람들. 그들과도 좋은 이별을 하고 싶었다. 이쯤 되면 뭔가 좋은 이별 증후군에 걸린 건가 싶은데, 작별인사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다들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지만, 서로가 느끼는 상황은 각기 달랐다.

나는 문득 나보다 훨씬 어른으로 보였었던 그들 인생의 낙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한 선배는 딸과 시간을 보내는 것, 어떤 분은 가족 모두가 집에 있고 각자의 할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인생의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한 명은 낙이 없다고 했고, 또 한 명은 운동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인생의 낙을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모두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커 보였던 어른들이었는데 왜 이렇게 작아 보이지. '비하'가 아니라, 내가 퇴사한 직장의 환경이 얼마나 사람들의 정신을 좀먹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동료의 해고를 지속적으로 보고 또 보게 될 사람들의 마음을 대의를 위해 일하는 높으신 분들이 알리가 없지.


퇴사 날
최악의 점심, 그리고 끝

퇴사 날 점심. 그래, 마지막 날 점심이지. 이제까지 팀원들과 점심을 먹지 않았다. 팀장과 점심을 먹기 싫어서다. 그런데 마지막 날 점심이라니까 같이 먹기로 했다. 

대망의 치즈돈가스 집. 사람도 북적이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팀장이 말을 건넸다. 나는 그 순간 눈알이 튀어나오려고 해서 앞말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늘 좀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네? (별거 아니지? 그냥 작별인사 같은 거겠지? ^^)"

"새로 나온 영상에 광고를 붙여야 하는데 그 작업을 좀 해주세요"

"네? 광고를요?(내가 잘못 들었나?^^) 집행하실 것 같으면 업무담당자를 정하셔서 오늘 하시면 될 텐데요. 제가 일을 진행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그냥 업체에 말하면 해주는 거 아니에요?"
"영상에 맞는 타깃 설정, 광고금액에 따른 견적, 수수료 협상도 좀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앞으로 일을 담당하실 분이 하는 게 맞지 않나요? 그리고 저 오늘 남은 일들 마무리하느라 너무 바쁘고, 오후에도 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짐 정리도 못했고요"

"아.. 그럼 알겠습니다. 월요일에 해야겠네요"


실화냐. 퇴사 당일 점심에 새로운 업무지시. 휴. 점심시간 다 망쳤네. 그리고 또 하나 더 있지.


"아마 전화할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네? 전화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 ㅎㅎ 인수인계서에 전부 다 적어뒀어요."

"제가 안 하고 000님이 하실 거예요 ㅋㅋ"

"(미쳤나 하는 표정 짓고, 정색하며) 팀장님 저 진짜 전화 안 받고 싶으니까 되도록이면 전화하시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플랫폼 기능적인 부분들은 네이버 찾아보면 다 나오니까요(그런 일로 전화하지 말란 말이야)"


아니, 인수인계서를 7페이지를 적어주고, 파일들도 다 살려뒀는데 전화를 왜 해? 내가 퇴사하고도 부하직원인 줄 아는 건가. 뭐가 재밌다고 웃는 거지? 정작 타의로 그만두게 된 직원들한테는 전화도 못해서 벌벌 떨면서. 


여러분 절대로 퇴사하는 사람에게 일 안 시키겠지 하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전 퇴사하겠다고 말한 그날부터 미친 듯이 일을 시켰기 때문에 참고하세요. 퇴사하겠다고 말하고 실제 퇴사일 사이가 좁으면 좁을수록 좋다는 것! ^_^
퇴사자의 바탕화면(왼쪽), 깨끗해진 내 책상과 포도송이가 된 전화선(가운데), 캐리어 끌고 퇴사잼(오른쪽)

그리고는 업무를 마무리하고,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고 옮기고, 짐을 다 싸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펼쳐두고 짐을 싸는 나에게 내 평생 친구로 남을 대각선에 앉은 후배가 다가왔다. 그녀가 편지를 건넸을 때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 고마워서. 그 편지들로 내가 힘이 났던 기억이 나서. 그때의 감정들이 밀려와서. 고마워요, 고마워. 

짐을 다 싸니 저녁 9시였다. 퇴사 날 야근이라니. 뒤 돌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회사 건물을 올려다봤다. 출근 첫날, 이렇게 큰 건물에서 일한다며 좋아했던, 어리고 열정적이었던 내가 떠올랐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영영 그곳을 떠났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나 자신. 

잘 버텨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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