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3월 13일 수요일
제주도 올레길에 눈 뜨다. 그 말로만 듣던 올레길. 물론 아이들을 인솔하고 7코스나 이런 부분을 걷기도 했지만. 체계적으로 끝까지 걸어본 경험이 없어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의미 있게 제주를 여행하는 차원에서 올레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성산 일출봉 근처가 올레길 1구간이라고 하여 예전 기억을 살려 광치기해변 근처의 무료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긴가민가하며 걸어서 성산 일출봉 쪽으로 걷는다. 3월은 제주에서도 약간 아직 비수기의 끝자락에서 몸풀기를 시작하는 시기인 것 같아 시간이 되는 사람들은 이때 여행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산 일출봉 주차장 입구를 돌아 좌측으로 꺾어 올레 방향표지를 보면서 쭉 걷는다. 아직 올레 패스포트를 구입하지 않은 상태라 그런 것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그저 걷고 걸어서 성산항을 옆으로 돌아 배수갑문을 타고 구좌읍 방향으로 바다를 보며 걷다가 배가 고프면 집사람이 준비한 간식과 과일을 먹고 내쳐 걷는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우리 부부가 한가로이 걷는 것은 처음이 아닌가 한다. 바로 이것이 나의 퇴직을 유발한 내면의 목마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시래기국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계속 걸어서 종달리를 통과하여 알오름에 오르니 오늘 우리가 걸어온 길의 먼 배경으로 성산 일출봉이 아득히 보인다. 두 발을 기반으로 걷는 사람의 걸음걸이가 자동차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볼 때 나무늘보처럼 둔중하고 느려 보이지만 우습게 볼 일이 아니란 자각이 든다. 예전에는 모두 뚜벅이의 운명을 감내하면서 그 먼 거리를 걸어 다니며 살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시간이란 것이 상대적이라는 말은 물리학상의 심오한 진리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빠르게 운동하고 있는 사람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것은 예전에 짚신을 신고 한양에서 부산까지 걷는 사람의 경우와 자동차, 비행기를 타고 금방 이동하는 사람의 삶의 경험은 양적으로 다를 것이기에 그 다른 양적 요소가 결합하여 질적으로도 다른 결과치를 산출할 것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속도만이 능사는 또 아닐 것이다. 느림에 대한 갈망이 그 반대의 관점에서 솟아나는 것 또한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본다.
말미오름을 돌아서 내려오다 보니 올레길 공식 안내소가 있다. 들어가서 살펴보고 이런저런 정보를 얻다가 올레 수첩을 구입하여 스탬프를 찍고 나니 올레길 전 구간을 완주하는 목표에 대한 도전 의식이 샘솟는다. 수첩 하나에 2만 원. 두 권을 구입하고 한 구간 평균 3개의 스탬프 중에 종료 스탬프를 찍었다. 그런 오늘 시작점과 중간점은? 그냥 지나친 것이다. 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1번 버스를 타고 가기 전에 중간 스탬프 지점인 목화휴게소에 지름길로 다시 가서 스탬프를 찍었다. 버스를 타고 광치기해변 근처에서 하차한 후 시작점 스탬프를 또 찍으니 이제 1구간을 완주했다는 자기 증명이 가능하게 된 셈이다. 이 어찌 뿌듯하지 않으랴. 새삼스레 총 27개 올레길 구간 전체 완주에 대한 의욕이 충만해진다. 그래서 집사람과 3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완주하자는 다짐을 하고 그 비용을 위해 적금이라도 들자고 논의를 해본다. 차를 끌고 성산 일출봉 주차장 근처 커피집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영어를 구사하는 직원들이 인상적이다. 오늘은 숙소로 귀환하자. 보람 있는 하루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