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0월 12일 토요일
오늘은 숙소에서 퇴실해야 하는 날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냉장고는 물론이고 옷가방과 빨랫감을 분류해서 따로 정리했다. 미리 모든 짐을 카트를 이용해서 차에 실은 후 퇴실 통보를 했다. 이제 주천 안내센터에 차를 주차하고 주천에서 운봉까지 구간을 마무리하고 나면 지리산 둘레길의 1회 완주 마침표를 찍게 된다. 주천 둘레길 안내센터는 4월에 처음 구간 돌기를 시작하기 위해 도착해서 안내센터 스탬프를 찍었던 장소다. 아침 8시쯤 운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징검다리를 건너 내송마을을 지나면서 개미정지에서 스탬프를 찍었다. 이로써 스탬프 찍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길 걷기 자체를 즐기면서 끝까지 가보자. 개미정지를 지나 구룡치쯤 갔을 때 정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직 서울로 가지 않았고 오늘 가는데 오전에 일을 조금 하고 1시쯤 갈 예정이니 가면서 나를 운봉에서 주천까지 회차시켜 주겠다는 고마운 말을 하기에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괜찮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 기회를 활용하기로 한다.
구룡치를 지나 회덕마을과 노치마을을 지나 가을 들녘을 지나니 마음이 풍요롭다. 누렇게 벼가 익어 있거나 이미 추수가 끝나고 사료용으로 잘 말아놓은 볏짚단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논에 놓여 있다. 덕산저수지 끝자락의 질마재를 지나 심수정에서 간식을 먹는데 말벌들이 너무 많아 생명의 위협을 느껴 대충 먹고 길을 다시 나섰다. 양묘장을 일부러 감아 돌게 만든 길을 따라 운봉 읍내로 들어가 상가를 끼고 관통한 끝에 운봉초등학교를 지나 좌회전하여 큰길을 건너면 바로 9일 수요일에 도착했던 운봉 서림공원이다. 이때가 12시 반쯤 된 시각이었다. 춘향전의 운봉 영장이 주재하던 고을이 바로 여기겠거니 한다.
점심을 먹으려고 앉아 있는데 연세가 되어 보이시는 분이 점심을 먹는 나를 보시고는 옆으로 다가오기에 처음에는 이쪽이 아니라 다른 쪽이 진행 방향이라고 했더니 당신도 식사를 하고 가려고 한다고 하신다. 부산에서 오셔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가끔 민박을 이용하면서 벌써 몇 바퀴는 될 거라고 하시니 이제 겨우 한 번 수많은 비용을 들여 걷기를 마치는 내 입장이 너무 요란스럽고 장황한 것 같아 하심의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 조용히 친환경적으로 걷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고 걷기의 고수들이 전국 강호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1시 15분쯤 정 선생이 도착했는데 정 선생은 점심을 아직 먹지 않은 것 같은데 또 빵으로 대충 때우려고 하는 것 같다. 내가 아내가 준비한 음식을 버릴 수가 없어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같이 먹지도 못하고 사주마고 해도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면 서울 가는 길이 점점 늦어진다고 맞는 말을 하기에 할 수 없이 같이 주천으로 서둘러 이동한다.
주천센터에서 완주증을 받기 위해 기부금 만 원을 내고 숲길에서 제작한 둘레길 안내 책자도 18,000원에 구입했다. 간단한 양식을 작성하고 손에 든 완주증은 일련번호가 3339번이다. 겨우 완주자가 이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공식적으로는 그런가 보다. 그런 증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몇 바퀴씩 걷는 사람도 많을 터이므로 정확성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속인이기에 증서를 기념으로 받고 싶다. 퇴직 후 하나의 목표를 달성한 자축의 의미로 말이다. 정 선생이 별도로 내 사진을 휴대전화로 찍어 주었다. 그래 이런 맛이지.
주천을 뒤로하고 서울 집으로 향하는 길에 정 선생과 이인휴게소에서 만나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정 선생은 간식으로 간단히 요기를 한다. 이번에 정 선생의 따뜻한 마음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나 같으면 쉽지 않을 그런 호의를 아낌없이 베풀어준 점에 진심을 담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길 선생과 정 선생, 그리고 백 선생은 같은 직장에서 동기라는 명분으로 만나 오랜 세월을 함께한 그런 인연이 있다. 그건 소중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마음에 오래 담아두고 기억하며 잘 지냈으면 좋겠다.
자, 지리산 둘레길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보았고 전에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눈을 주지 않았던 삶의 자잘한 요소들에 주목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삶이란 어디에서나 존재를 가득 채우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무릇 생명 있는 존재들은 살고자 하며 그것도 잘 살고자 한다. 평범하고 드러나지 않는 일상의 삶이 흐르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켜켜이 겹치고 섞이고 흩어지면서 무늬를 만들어간다는 점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지리산 자락은 많은 과실수가 생계를 위해 관리되고 있는 곳임과 동시에 세상을 먼저 살다가 수많은 선인들의 무덤이 흩어진 묘지임을 보게 되었다. 충무공이 백의종군의 입장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어 조선 수군을 재건하여 왜군 함대와 맞서 싸우다 자신의 길을 간 그 길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우리도 그렇게 이 땅의 어느 언저리에서 살다가 종래에는 한 줌의 뼈로 눕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삶이라는 선물이 주어진 한 그 시간을 뼈저리게 느끼고 향유하면서 살아가라. 신께서 허락하신 한 모금의 기쁨을 온전하게 느끼도록 노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