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일본인

그리고 세대에 따른 변화 (2025년 10월 4일)

by 그래도 캠핑

교토화법이라는 것에 대한 우스개가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일본인들의 과도한 친절함에 대한 연구는 많았다. 혹자는 저 친절함이야 말로 일본을 관광대국으로 만든 주동력이라고 찬사를 했고, 혹자는 겉 다르고 속이 다른, 혼네 (本音)와 다테마에 (建前)로 대표되는 일본사회의 일면으로 분석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과도한 친절함이 어떻게 단점이 될 수 있을까 싶다. 그게 비록 바로 200년 전까지만 해도 툭하면 칼을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던 걸 수도 있고, 아니면 화합과 조화를 중요시 여기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걸 치욕으로 받아들이는 오랜 문화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과도한 친절이 남들에게 강요되지만 않는다면 있어서 나쁠 건 없다 싶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군 쪽으로 전황이 크게 기울자, 전후 일본인들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 전략을 세우기 위한 연구의 일환으로 쓰였다. 카미가제나 집단옥쇄 등 당시 서양인들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일본군의 정서를.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던 일본인들은 미군정이 들어서자 아무런 반항 없이 순순히 순종하기도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 것인가. 일본을 한 번도 방문해 본 적 없이 오직 제삼자를 통해 듣거나 전쟁포로들의 행동을 연구하면서 쓰였음에도, 루스 베네딕트의 분석과 추론은 무척이나 정교해서 아직도 일본문화 연구에 있어서는 바이블로 여겨지고 있는 책이다. 한 챕터에서는 일본인들의 죄의식과 치욕에 대해 다뤘는데, 거칠게 정리하자면 일본인에게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본인 자신의 가치관보다 집단의 평가에 더 많이 의존한다는 것.


이른바 수치의 문화인데,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치욕스러워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얘기였다. 때문에 피해자들과의 합의와 용서를 통해 죄를 사면받지 않으면 계속해서 치욕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이건 곧바로 죽음이 아니면 분노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 읽고 나서, 독일인들은 해마다 자신들의 전쟁범죄에 대해 반복적으로 사과를 하는 반면, 일본인들은 전쟁 당시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부정을 하고, 고등교육 과정에서도 생략하는 이유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종종 일본의 정치인들이 "도대체 한국은 언제까지 계속 사과를 요구할 것인가?"라는 발언을 하는데, 그들에게 전쟁범죄를 인정하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가 아니라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불친절하고 타인과 화합하지 못하는 태도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신의 행동 가치가 철저하게 타인이나 사회관습의 시각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자신이 진정으로 잘못을 하지 않더라도, 먼저 스미마셍 하고 나서는 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좀 더 화합을 신경 쓰는 자세, 좀 더 어른스러운 자세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일본어로 '야사시이 (優しい 상냥한, 친절한)'는 사람에 대한 극찬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그야말로 관습으로 인정받는 태도, 밖으로 보이는 태도, 남들 면전에서 행해지는 태도 (다테마에) 일뿐, 실제 그들의 속마음 (혼네) 역시 친절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표면적으로나마 친절할 수 있는 건, 어차피 남이니까, 필요할 땐 얼마든지 부드럽게, 혹은 능청스럽게 거절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반증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괜히 남들한테 친절했다가는 나중에 어중이떠중이 죄다 덤터기 쓰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처음에는 무뚝뚝하지만, 막상 친하게 되면 남들 부탁을 쉽게 거절 못 하는 한국인의 기본정서와는 상반적이다.










계속 헛스윙을 하고 다녔더니 어느새 오후 3시. 드디어 호텔로 돌아와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었다. 아직 정신이 몽롱했지만 그래도 배낭을 샅샅이 까뒤집었는데 애플펜슬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민박집 냉장고 근처에 분실물 없는지 잘 확인하고 체크아웃하라고 쓰여있었던 것 같던데... 이런 일이 얼마나 잦았을까 충분히 납득은 가지만 그래도 한 번 연락을 해봐야겠다... 숙소 예약앱을 통해 편지를 한 번 보내봤더니, 거실바닥에서 찾아냈고 고맙게도 다음날 삿포로 시내로 나오니 호텔로 가져다준다고 한다. 바쁘면 호텔 프런트에 맡겨두겠다고까지. 아이고오오오. 감사합니다. 복 받으세요. 메구미 상.



Ai 시대에서는 이 정도 메일을 쓰는 건 어렵지 않다. 오히려 이미지에서 글자 인식을 해서 번역을 하는 게 더 어려운 듯. 말랑말랑은 '마라톤'을 잘못 읽은 파파고의 오역





그럼 이제 밀린 빨래를 할 시간. JR Inn에는 세탁실이 있다. 이 지점 삿포로 미나미에는 지하 1층 대욕장과 라운지 옆에 있는데, 엥? 여기에 근사한 소파가 있네. 아놔.. 그렇게 헛스윙하며 헤매지 말고 애초부터 그냥 지하로 올 것을.... 왠지 여기서 한숨 잤으면 지금쯤 완전히 회복이 되었을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라운지에는 각종 만화들이 잔뜩 하하하하. <골든 카무이>는 물론이고 <은수저> 등 모든 홋카이도 배경의 만화들을 모아뒀다. 그런데.. 막상 읽고 있는 사람은 없네. 하긴, 대부분 관광객이나 출장 온 사람들이 묵는 곳일 테니 한가롭게 여기서 만화책을 읽고 있을 시간은 없겠지. 3대의 코인 세탁기 역시 모두 비어있었는데, 그중 2대에 가득 채워 돌렸다. 건조 역시 2대를 사용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중간에 방에 널 수 있는 걸 덜어냈음에도 80분 정도 돌려야 했다.


세탁을 하는 동안 대욕장에 가서 몸을 담근다. 무슨 온천물을 끌어다 쓴다는 소문이 있던데 진위는 알 수 없다. 온천물이든 수돗물이든 간에 뜨신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보니까 역시 피곤이 풀리는구나. 아.. 그렇지. 한국 직장인들의 전통적인 숙취 해소 방식에는 사우나가 있었지. 게다가 라운지에는 커피 기계가 있어서 목욕 후 커피 한 잔 땡길 수가 있는데... 근데... 여긴 그냥 냉수가 나오는 곳은 없구나. 그러고 보니, 이전 공항 호텔에서도 노보리베츠에서도 생수가 나오거나 물병에 담을 수 있는 기계는 보질 못했다. 민박집에서도 병당 100엔씩 주고 사 먹었다. 일본인들은 냉수를 원할 때는 그냥 수돗물을 마시는 건가? 알 수가 없다. 밴쿠버에서도 수돗물의 품질이 나쁘지 않아서 생수를 돈 주고 사 먹은 경우는 없지만, 그래도 중금속 등에 대한 걱정 때문에 브리타로 한번 더 정수해서 먹는데. 아, 그러고 보니 브리타가 애초에 일본 브랜드 아닌가 (독일 브랜드였습니다, ㅠㅠ)









오늘 저녁은 처제와 동서를 만나 같이 저녁을 할 예정. 오전에 내가 젖은 걸레처럼 늘어져 있을 때부터 아내는 식당을 알아보러 다녔는데, 그중에 선정된 곳은 '쿄도료리 코후지 (郷土料理 こふじ)'라는 숙소 근처 식당으로 한상차림 가정식이나 이지카야 스타일의 안주류를 같이 제공한다. 한국의 가정식 식당이 그렇듯이 두툼한 책에 빽빽하게 메뉴가 쓰여있었다. 아내 입장에서는 가장 가성비 좋고 가장 리뷰 좋고 가장 접근성이 좋은 식당을 고른 것이었을 텐데, 물론 그렇게 고르고 고른 식당이 누구나 다 환영해 주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밴쿠버에 있는 식당에 가면 몇 명이 왔는지를 먼저 물어보지만 이번 홋카이도 여행 동안 갔던 식당에서는 대부분 '예약'을 했냐는 질문을 먼저 받았다.


일본에서는 타베로그나 구글, 라쿠텐 등으로 온라인 예약을 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아직 홋카이도 지역 골목식당들은 전화나 방문 예약을 선호했고, 우리처럼 일본어를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관광객이 그걸 했을 리가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호텔 컨시어지나 지인을 통해서 전화 예약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주변머리 역시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랑 그제 갔었던 '시하치'의 경우에도 메구미 상이 대신 예약을 해주겠다고 제안을 했었는데. 예약을 안 하고 갈 경우 잠시만 기다려보라는 말과 함께 주방 스텝들과 상의를 한다. 슬쩍슬쩍 우리 몰골을 관찰하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왠지 심사를 받는 느낌이다. 그러고 나선, 매우 공손하게, 스미마셍을 빼먹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여가면서, 안타깝게도 오늘은 만석이라고 거절을 당한다. (아내의 직장 동료 중에서는 도쿄에서 온 사람이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확실히 홋카이도는 아직 시골이구먼"하며 혀를 끌끌 찼다고 한다. 물론 그녀도 '오버 투어리즘' 이슈로 일본 사회가 관광객을 경계하기 전에 밴쿠버로 왔으니, 지금 현재 도쿄의 모습을 잘 모를 수도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뒤돌아 나와 계단을 올라오는데, 아내가 그럼 내일 저녁 예약을 미리 해두자고 하면서 홀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아시타, 요야쿠 (내일, 예약).."를 더듬더듬하면서. 그랬더니 또 주방과 한참 얘기를 하고 나서는 지금 4명이 앉기에는 약간 좁은 좌석밖에 없는데 거기라도 괜찮겠냐고 묻는다. 아유. 많이 괜찮지. 왠지 이렇게 되면 마치 아무나 주지 않는 귀한 상품을 우리에게만 특별히 보여준 것처럼 황송한 마음마저 든다. 어라? 근데 막상 테이블을 보니 널찍하기 그지없다. 이 뭥미? 아... 맞네. 심사받은 거네. 진상 손님인지 아닌지.



책 한 권을 빽빽하게 채운 메뉴






음식은 무척 근사했다. 처음 오토시로 나온 소라와 생선조림, 다시마 절임부터, 회도 신선했고 음식 하나하나가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으로 정성껏 요리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의 수다를 더 깊게 해 주는 술과 안주 모두 만족스러웠지만, 문제는 의외로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옆 테이블에 연배가 있는 한국 손님들이 앉아 있었는데, 아... 저런 식으로 식당 종업원들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 오랜만에 보네. 손을 휘저으면서 오이오이하고 부른다. 고객서비스 업종에서 오래 일했던 경험 때문인지 저런 걸 보면 부아가 치밀지만.. 그래도 각자 사람마다 다른 소통방식이 있겠거니.. 하며 가만히 있었다.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호또워터'를 반복하는데 종업원의 표정이 굳어있다. 오지랖을 부려 따뜻한 물 달라고 하네요라고 일본어로 말했더니 그 굳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나서 휙 일어난다. 어라? 느낌이 쌔했지만 가족들과 회포를 푸는데 집중하기로 한다.


이제 슬슬 자리를 작파하고 나서려고 할 참에 계산대에서 작은 소란이 보였다. 옆 테이블에서 메밀국수를 주문했는데 한 그릇이 덜 나왔다는 것. 불콰한 얼굴로 '원모어소바'를 큰소리로 반복하는데, 계산대에 있는 젊은 직원도 지지 않고 핏대를 올리며 '와카리마셍 (모릅니다, 못 알아듣겠습니다)' 하며 응수한다. 오오오오. 강한 모습. 일본 사회도 변하는 모양이구나. 혼네, 다테마에가 다 뭐람. 화합을 가장 중요시해서 부당한 일도 웃는 얼굴로 받아들이는 걸 미덕으로 삼는 시대는 이곳에서도 끝이 보이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술도 어느 정도 올랐고 외국어는 기세라니까, 또 한 번 오지랖을 부려서 그 직원에게 이 손님 테이블에서 국수를 하나 덜 받았다고 한다..라고 얘기를, 파파고의 힘을 빌려서 해봤는데, 일언지하에, 소리를 빽,



아나타와모우이이데쓰 (당신은 그만 됐어요)!



....



야, 너 대차다.


내가 아무리 일본어를 모른다고 하지만, '아나타 (당신)'이라는 단어를 손님한테 쓰면 안 된다는 거 정도는 아는데, 내가 끼어드는 게 그리 고깝더냐?...


하지만, 순간 너무 당황했던지라 그 앞에서는 암말도 못하고 스미마셍.. 하고 찌그러졌다. 이 정도면 누가 더 일본인스러운 건지 알 수가 없네. 역시 말 잘 못하는 관광객 입장에서는 일본인들이 계속 (적어도 내 면전에서만큼은) 친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 이곳 외에 대부분의 다른 식당들은 여전히 친절했습니다. 어떤 곳은 북미 식으로 꼬박꼬박 말을 걸고 영어로 의사소통도 편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날 2차로 갔던 식당은 '세로리 (せろり。)'라고 하는 오뎅 전문 이자카야에서는 젊은 직원들이 모두 영어를 잘했고 무척 친절했습니다. '가마에이 가마보코'와 비교하자면 맛은 그저 그랬지만



*** 쿄도료리 코후지 식당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와 추천 메뉴는 '미식유망주' 님의 브런치를 확인하세요 https://brunch.co.kr/@jpngome/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