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여유
나는 바다만 보면 해변을 하염없이 걷고 싶다. 서해안은 조개가 많아 줍기도 하고 재미는 있는데 보드라운 하얀 모래가 있는 곳을 맨발로 걷고 싶다.
제주에는 예쁜 모래사장이 많았다. 렌트한 차로 돌아다니다 제주 어느 해변이 너무 예뻐서 걸었다. 행복한 한 때였다.
호주 일정 중 단 하루의 자유시간에 나는 또 바다에서 놀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나오는 쌍둥이 자매처럼 바다에서 걷고 달려보는 것이다.
한술 더 떠서 하얀 원피스를 입고 모래를 밟으며 뛰어보았다.
그런 나의 모습은 누구의 눈에나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소위 약간 돌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호주인들에게 바다란 뛰어들거나 모래에 드러눕는 곳이거나 하는 곳 같다.
멀쩡히 파티복 같이 차려 입고 뛰어다니는 곳이 아닌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니 뭐 어떠랴. 호주의 브리즈번 골드코스트다.
그런데 다시 볼 사람들이 있었다. 같이 갔던 팀이다. 그들은 나를 이해해 줬고 함께 걸어줬으며 사진도 찍어줬다. 우리 모두가 이방인이 되어 잠시의 시간을 나눴다.
부안 솔섬에 자주 간다. 그곳에 앉아 바다를 하염없이 보다가 책을 읽다가 검은 몽돌을 만져보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훌렁 간다.
딸과 함께 간 보홀 버진 아일랜드다. 바닷물에 나무가 자라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바닷속으로 계속 걸어가고 싶은 희한한 바다였다.
바다에 가고 싶다. 라캉의 욕망의 사슬처럼 나에게 바다는 마르지 않는 대상-a이다.
다른 작가님 브런치의 바다를 보니 내 안의 목마름을 조금 이해한다. 가족이 함께 바닷가를 거닌다면 참으로 더욱 아름다울 것 같다. 모두 바쁜 각자의 삶, 우리에게 그럴 날이 올 수 있을까. 나는 로자문드 필처의 <조개 줍는 아이들>처럼 지난 시절 아이들과 해변에서 놀던 한 때, 아니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어린 내가 조개를 주으면서 놀던 때를 떠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