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나누는 친구들
벚꽃과 개나리보다 먼저 산수유가 피어 온 나라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구례 산수유 마을에 놀러 가기로 했다. 제니퍼가 이른 은퇴를 하고 전원주택의 자연인이 되기로 한 것을 기념하는 나들이다.
애들아~ 우리 산수유 보러 가자
"그래, 근데 벌써 피었을까?" 제니퍼가 답한다. "그냥 가 보게. 줄리아에게 연락해 봐."
그렇게 맑은 날 우리 제이 클럽은 길을 나섰다. 화심에서 합류하기로 한 줄리아를 태우러 가는데 하천의 풀들이 예뻐서 사진을 찍는다.
"너는 뭘 그렇게 찍냐. 나는 여기 냇가에 어릴 때 식구들이랑 물놀이 자주 왔던 곳인데. 지금 물이 너무 없다."제니퍼가 말한다.
"응, 저기 강태공이 있었는데 지나쳐 버렸네. 요즘 정말 천에 물이 없지. 물이 모자라긴 한가 봐. 낼모레 비 온단다. 근데 너는 효자동 살았다면서 여기까지 왔어? 나는 모악산 아래 냇물에서 놀았는데." 내가 답한다. 어릴 적에는 넘치도록 물이 많아서 마구 아무렇게나 손과 발을 젓는 개헤엄을 치며 놀았다. 이젠 염소 냄새가 나는 수영장에나 가야 물을 실컷 만난다.
"네비는 어디로 해?"
"응, 상위마을. 전남 구례군 산동면 하위길 12."
"어, 잠깐~ 여기 좀 세워봐. 차 안 다니니까 길가에 세워도 되겠지? 산수유 마을이라서 그런지 가로수도 산수유다. 그런데 별로 안 피었어." 내가 말한다.
"저기 위에 산수유 마을 보이네. 그런데 아마 여기가 더 핀 걸 거야. 마을 쪽은 안 피었을걸? 원래 2주 후쯤 와야 만개할 거야. 그럴 것 같더라. 지금 개화시기가 아니야~. 3월 20일 이후에 한창이어서 그때 산수유 축제를 한대. 그런데 올 해는 안 한단다. 코로나 때문에." 운전 중인 제니퍼가 대답한다.
"그래? 정말 안 좋다. 그래도 아기같이 피어난 것들도 너무 귀엽다. 꼭 왕관 모양이야." 조금 있는 것들을 보면서 신이 난 나는 사진을 찍어와서 차 안에서 다시 보면서 한마디 한다.
"그런데 영어로 활짝 핀 걸 뭐라고 하지?" 제니퍼가 물었다.
"블룸(bloom)이잖아." 줄리아와 내가 답한다. blooming. full bloom.
"애들아, 파파고 앱 알아? 그게 구글 앱보다 약간 감성적인 것 같아. 나는 파파고를 선호하는 편이야."
벚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The cherry blossoms are in full bloom.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봉오리가 나올 생각은 하는 것 같다.
"말 꺼낸김에 활짝 핀 꽃과 관련된 문장 찾아볼게. 네이버에 이런 문장이 있네. 내가 읽어볼게!"
Desire makes everything blossom; possession makes everything wither and fade.(Marcel Proust) 열망은 모든 것을 꽃 피게 하지만 소유는 모든 것을 시들고 스러지게 한다.
"철학적이다. 나는 이걸 어디서 경험했냐면 아주 조그만 풀꽃이 예뻐서 꺾어 화병에 놓았더니 바로 죽었어. 역시 그 자리 그곳에 자유롭게 놓아야 할 것 같아. 자식이나 남편도 마찬가지인 것 같지?"
우리들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할 말이 무에 그리 많은지 정말 신기하다.
어느 지인이 한 이야기가 있어.
아내가 한참 동안 전화를 붙잡고 이야기를 해서, 뭘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모르겠네 하고 있었단다. 그랬더니 "그래, 조금 있다 보자.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우리랑 비슷하지? 하하하.
예전에 라디오 프로그램에 어떤 가수 분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는 친구들끼리 만나면 엄청나게 수다를 떤단다. 돌아와서 생각하면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는대. 서로 각자 자기 이야기를 목 아프게 하다 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조금 안심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네.
최근 제니퍼와 줄리아는 필리핀 전화 영어를 매일 하고 있다. 나만 뒤처지는 느낌이다. 나는 붙잡혀 앉아 규칙적으로 공부하는 체질이 아니다. 그래도 영어를 잊지 않기 위해서 또한 친구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해서 미국 친구와 어쩌다가 한번 통화한다. 그 친구는 외롭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듯 내가 전화만 하면 엄청나게 기뻐한다.
그런데 한번 통화를 시작하면 끊기가 미안하다. 아이폰끼리라서 무료통화인데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꼭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못 할 때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과 아주 약간 유사한 느낌이다.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른 끊기가 싫은 것 같으니 바쁜 나는 자주 전화 걸기가 어렵다.
이 나무들이 온통 노랑으로 물드는 3월에 다시 들려야겠다. 주말이면 사람이 그리 많다는데 올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얼핏 보아도 이제 봉오리 맺힌 정도다. 다 피면 얼마나 화사할지 미리 들떠본다. 대신 오롯이 우리 셋이 걸으니 조용하고 한적해서 행복하다.
마을이 고색창연하다. 개량사업을 그리 심하게 한 것이 아니라서 보기에 편하다. 설마 지붕이 석면 이런 건 아니겠지? 한때,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지붕의 개보수에 사용되었다.
이 석면이 1급 발암물질로 밝혀지면서 철거에 비용이 엄청나게 부과되었다. 그래서 농가 지붕의 경우 정부 지원사업으로 많이 철거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주의 오래된 주택이나 빈집들을 보면 아직도 버젓이 석면 지붕이 길가에서도 보인다. 주인들이 철거를 해야 하는데 비용 부담으로 그대로 방치한단다. 그러면 남의 건물을 마구 철거할 수 없기 때문에 시에서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니 참 답답한 노릇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에서 석면 지붕 이야기를 장황히 하니 불편하다.
이제 아름다운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한다. 마을의 돌담은 지난번 산청 돌담길보다도 더욱 정겨운 진정한 자연 돌담의 형태로 남아있다.
내려오다가 다시 차를 세운다. 진짜 예쁘게 핀 산수유 발견이다.
"나는 2주 후에 다시 와야겠다." 제니퍼가 말했다.
"너는 좋겠다. 이제 자유의 몸이라서 평일에 산수유 보러 올 수 있으니. 나중에 오면 사진으로 보여줘~." 우리 둘은 부러운 눈초리를 보내면서 대답한다.
"우리 배고픈데 밥부터 먹을까? 예술인 마을 갈까?"
"밥은 어데 가서 먹어?"
"구례 읍으로 가서 고등어구이 먹자."
"그래, 그럼 밥 먹고 예술인 마을 가자."
"구례 읍에 가면 산도 하나 있는데 밥 먹고 올라갈까? 전망이 좋아. 노고단이 멀리 보여."
"그러자. 노고단 안 가본 지도 오래되었다. 보기라도 하자."
열심히 달려서 도착한 구례 읍사무소 앞 나의 애착 고등어 백반 구이 집은 주인의 사정으로 1시 30분에 점심시간을 종료했다고 한다.
"정말 안된다고요? 이것 먹으러 멀리서 왔는데요."
"네, 죄송해요. 사정이 있어서요."
"그럼 다른 맛집 소개해 주세요."
"바로 앞에 백반집도 손님 많아요."
오징어 회 무침이 신선하고 맛있다. 시래깃국이 구수한 맛이다. 커다란 보글보글 뚝배기에 시래깃국이 나온다.
"이거 국물에 쌀뜨물 넣으셨네. 맞지요?"
어쩐지 맛이 다르다. 고등어구이 백반(8천 냥) 대신 백반정식(8천 냥) 선택했어도 괜찮다. 모두 맛있어서 다행이다.
"오늘 날씨 기온 높다고 하지 않았어? 아이, 추워."
"기온은 높은데 바람이 정말 많이 분다. 겉옷을 괜히 차에 두었다."
"애들아~~~ 추운데 우리 산은 다음에 갈까? 그냥 차로 가서 예술인 마을 가자."
"하하, 그래 그러자. 하여튼 우리는 여행 가서 싸울 일은 없다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다들 오케이라서."
"헤헤, 그래."
예술인 마을로~~
"어, 이정표 나왔다. 차 좀 세워봐! 저 위에 보리밭 있어." 사진 찍을만한 곳 나오면 아무데서나 차를 멈추라고 하는데 짜증 한번 내지 않는 제니퍼는 천사다. 물론 주변에 차가 한 대도 없는 곳이다.
"나도 보리 한평 심었다." 제니퍼가 말한다.
"그래? 그럼 청보리 구워줘." 내가 신이 났다.
"몰라~! 그때까지 잘 자랄지. 정말 조금 심었어."
제니퍼는 나의 <청보리 구이> 글을 읽은 후 꼭 청보리 구이를 한번 맛보고 싶었다고 한다. 나와 비슷한 유년기를 보냈다. 산골 아이다.
https://brunch.co.kr/@campo/2
줄리아에게는 생소한 청보리 구이 이야기를 우리 둘이 신나서 한다. 그 맛이 어쩌네 저쩌네 하면서......
마을 앞에는 자그만 호수가 있다.
찻집에 들어서니 썬룸이 있다. 우리는 썬룸에서 마시기로 한다. 드립 커피만 있다고 해서 기다리면서 창밖 너머 호수를 본다.
커피잔들이 예쁘다. 안쪽에 화려한 꽃자수와 같은 무늬가 있다. 드립 커피 6천 냥이다. 그런데 머그잔이 아니라서 좀.... 그래도 두 번 내려 주셔서 나는 서로 다른 맛을 두 잔 마셨다. 야호~!
독일에서 빵 공부하신 아드님이 직접 구운 빵이라고 한다. 물론 판매하는 호밀 빵이다.
"애들아~ 여기 바질 좀 봐. 이거 진짜 싱싱하다. 나는 바질 죽였는데...... 부럽다. 바질은 추위에는 완전 별로야. 애플민트는 다음 해 싹이 또 나는 거 같던데."
"이거 히야신스 맞지? 아휴~ 예쁘겠다. 그런데 저 테이블 정말 예쁘다 그렇지."
우리는 별별 수다를 다 떤다. 특히 나는 썬룸에 들어갈 때부터 바닥의 타일에 시선이 머문다. 사장님께 어디에서 구입하셨는지 여쭈니 서울 어디 물어물어 가셨다고 생각도 안 나신단다. 헤링본 스타일도 멋지지만 청색과 남색 검정과 밤색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색이 무척 아름답다.
알프스 아이들과 비슷한 인형들에게 인사한다.
"리넨 느낌이 참 좋지. 그런데 리넨은 천이 비싸기는 해. 우리 리넨 천 떠서 뭐 만들어볼까?" 줄리아가 말한다.
"우리 휴가 다 끝났어. 제니퍼, 너는 좋겠다. 하고 싶은 것 실컷 할 수 있어서." 시종일관 은퇴하는 제니퍼가 부러운 나는 결론이 항상 똑같은 말이다. "부럽다. 좋겠다."
친구들이 전원주택을 사기 전에 땅을 샀었다는 마을로~~~~
줄리아와 제니퍼가 한때 예술인 마을의 위쪽으로 한참 들어간 곳의 땅을 샀던 적이 있다. 그곳은 현재 생태공원이 옆에 조성되어 있다. 코로나가 아닌 경우 제법 사람들이 방문할 듯한 모습이다. 남해 독일인 마을에서 내려다보면 바다가 보인다. 이 곳은 평야가 펼쳐진다.
"야, 나 어지럽다. 왜 이렇게 경사가 심한지." 제니퍼는 운전도 잘한다. 나는 정말 혼자 오지는 못할 것 같다.
"하하, 너는 하여튼 겁도 많다." 두 친구가 이구동성이다.
"아까 예술인 마을에 있던 개나리 닮은 노란 꽃 이름이 뭐라고? " 뭐든 잘 아는 제니퍼에게 묻는다.
"영춘화야. 한번 검색해봐. 개나리랑 많이 비슷하게 생겼지?" 하고 제니퍼가 대답한다.
검색해 보니, 영춘화가 맞다. 꽃말은 희망이라고 한다.
제니퍼는 그 후 다른 친구들과 다녀왔는데, 매화마을도 아름답고 산수유도 만발했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 동네에서 한창 만발한 산수유나무와 영춘화를 만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