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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Sep 17. 2020

찐빵 주세요

79번 버스와 찐빵

최근 전주역 앞에서 출발하는 빨간색 1000번 버스는 트롤리‘명품 버스’라고 불린다. 2015년 말 79번 일반 버스가 빨간 명품 버스로 바뀌어 운행되었다. 이듬해 1000번으로 번호가 교체되어 전주의 주요 관광 지점을 안내하고 있다.


전주 79번 버스는 나의 고향 마을을 지나는 노선이다. 2016년부터 다시 일반 버스가 되어 원래 노선과 더불어 금산사까지 운행한다. 그렇게 79번 버스는 전주에서 한동안 매체에 오르내렸다.


  “우리 초등학교 때 버스비가 얼마였지?”하고 친구들에게 물었지만, 다들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나 역시 버스비는 모르겠다. 다만,  나를 괴롭혔던 김이 모락모락 나던 찐빵 몇 개의 가격이 버스비와 같았다는 것은 정확히 기억한다.


그 당시 버스는 시간을 잘 어겼고, 때로는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거나 하는 이유로 시간을 건너뛰어 2시간을 기다린 적도 많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바로 그 장소의 창 너머로는 언제나 어김없이 찐빵 솥단지가 보였다.


만약, 손님이 들러 찐빵을 사면 마법의 램프에서 지니가 나타나듯 뭉개 구름 속 하얀 찐빵이 드러났다. 79번 버스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지나도 기색이 없으면 조바심을 넘어서서 나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러면, 선택을 해야 했다. 찐빵을 먹고 걸어갈지, 계속 기다릴지.                

엄마는 아침에 늘 그날그날의 버스비만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어느 날은 나의 이성이 마비되어 찐빵집에 들어가 버스비를 내밀고 “찐빵 주세요!”하고 말았다.


그러면 주인아주머니께서 조금씩 김이 나던 솥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아지랑이 같던 김이 온 가게에 순식간에 퍼지면서 하얗고 부드럽고 둥그런 찐빵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뜨거운 찐빵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반으로 가르면 달짝지근 맛 좋은 적갈색의 팥 앙금이 적당히 촉촉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통팥보다 잘 갈아진 앙금을 선호한다.          

그 집의 찐빵은 앙금뿐 아니라 표면의 흰 빵 부분도 얇으면서 터지지 않고, 부드럽기가 말할 수 없이 살살 녹았다. 늘 하는 말이지만 기억은 왜곡되기도 하니, 그 맛이 지금 내가 상상하는 맛인지 정확히 따져 볼 수는 없다. 어른이 된 후, 가 봤지만 가게는 온데간데없고, 커다란 빌딩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맛에 대해서 증명할 길이 없어 아쉽다.


버스비를 날리고 맛있게 찐빵을 먹을 때까지는 먹는 자체가 너무 행복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혼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날에 만약 찐빵을 사 먹게 되었을 때는 홀로 두 시간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서 집까지 가야 했기에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였다. 어제 길 찾기로 측정해 보니 어른 보폭으로 한 시간이 넘게 나온다.             


부모님께는 차마 “찐빵 사 먹어서 버스 못 탔어요!”라고 대답을 못 하고, 친구들과 놀고 왔다고 해서 늦었다고 혼나고, 걸어오는 내내 이상한 사람 만날까, 혹은 길가에 뱀이 지나가면 어쩌나,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때 찐빵과 버스비를 교환한 대가는 아주 혹독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의 찐빵 사랑은 계속되어 내 몸은 고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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