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으로 시작하는 단어
청포도, 청 복숭아, 청매실, 청보리 등 첫음절이 청으로 시작되는 단어를 접할 때면 나의 마음은 어느새 과거로 날아간다. 청포도는 이육사 시인의 시를 낭송하던 여고 1 학년으로, 청 복숭아는 어린 복숭아를 쏙아 준다고 딴 것들에 단것을 버무려 먹던 초등학생으로, 청매실은 술 좋아하시던 엄마를 위해 아빠가 과실주 담가 놓으신 걸 주스인 줄 마셔서 큰일 날 뻔했던 어릴 때 언제로......
아빠는 법학을 전공하시고 고시공부에 매진하셨지만 낙방을 거듭하신 후 할머니가 계신 시골로 귀농을 하셨다. 엄마는 시골 학교의 선생님이셨는데 나는 늘 엄마 따라 학교 가겠다고 마을 어귀까지 따라가며 울었다. 훗날 내가 교사가 되어 출근할 때, 나의 딸이 울면서 유치원 대신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할 때마다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아빠의 농사일은 너무나 바빴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청보리가 막 여물어지려고 하던 어느 봄날 저녁에 아빠가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셨다. 아빠는 불 찌꺼기에 구운 청보리를 손바닥으로 마주 뭉개서 후후 불어 껍질을 날린 후 나에게 내미시면서 "이제 먹어봐!" 하셨다. 구수하고 풋풋한 내음과 더불어 톡 터지는 알갱이들이 어린 내 마음에 통통 튀어서 나는 아빠에게 "또 주세요! 또!"를 반복했다.
전북 고창에서는 해마다 봄이면 청보리 축제를 한다. 청보리를 아무데서나 볼 수 있었던 나의 어린 시절이 그립다. 한 달쯤 전에 새싹보리 가루를 샀다. 그 후에 뉴스에서 새싹보리에 불순물이 섞인 것들이 시판되었다고 난리가 났다. 놀라서 알아보니 내가 산 것은 다행히 괜찮았다. 새싹보리 한 스푼과 우유 200ml 한 팩을 섞어 먹고 있다. 별로 새싹 내음도 나지 않지만 건강에 좋다니 먹게 된다.
자, 이제 먹어봐!
봄이면 청보리를 구워 비빈 후 손바닥에 놓아주시던 아빠가 그리워 가슴이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