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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Sep 13. 2021

앞집

인연

나는 언니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생활에서 언니란 단어는 나에게 낯설다. '언니'란 말이 쉬 나오지 않아서 때로 상대가 나에게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첫 공방에서


나의 첫 공방은 나만의 힐링 공간이었다. 특별한 모임을 제외하고는 일체 다른 사람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작지만 빼곡히 심은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것으로 모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공방 앞집에 나와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이들이 이사를 왔다. 눈인사는 하고 지내야지 생각했다. 마침 나의 꽃밭에 와서 꽃들이 너무 예쁘다고 칭찬을 해 주셨다. 그뿐이 아니다. 3,6,9월에는 식물에도 거름을 주어야 한다면서 당신들 화분에 거름을 줄 때, 나의 화단에도 거름을 주셨다. 내가 바빠서 못 가면 화초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면서 본인들의 호스를 길게 빼서 물도 뿌려 주셨다.


장미가 지나치게 가지를 뻗어 가지치기를 하는데, 사다리를 놓고도 손이 닿지 않아 고생하니 보다 못한 아저씨가 나서서 다 해 주셨다.


그 해 여름 내가 공방 골목에 심었던 접시꽃이 시멘트 비좁은 틈으로 싹을 틔우고 크게 자랐다. 어느 날 보니까 병원의 수액 튜브가 담장에 걸려있고 주사기가 뿌리 부분에 박혀 있었다. 물을 호스로 연결해서 공급하고 있었다.

 


프랑스 자수


겨울이 오면 화초를 가꾸는 일손이 바쁘지 않다. 농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한가해진다. 앞집에게 내가 자수를 할 줄 안다고 하니 배우고 싶으시다고 하셨다. 당연히 무료로 알려드린다고 했다. 공방에 오셔서 단 두 번 가르쳐 드렸다. 그 후에 마땅한 공유시간이 없어서 더 이상 가르쳐 드리지는 못했지만 유튜브로 어떤 형식으로 하는지 알려드렸다.


어느 날 나에게 보여주셨는데 너무 예쁘다고 하니 선물을 해 주셨다. 작은 걸 드리면 큰 걸 주시는 분이셨다.

수를 놓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동안이라 몰랐는데 나이가 나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다. 이름도 알려주시고 아저씨를 만난 사연도 재밌게 들려주셨다. 나는 직업도 이름도 가족도 알려드리지 않았다. 그저 '루씨'라고만 알려드렸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더 이상 묻지 않으셨으며, 늘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말씨가 부드러운 분이셨다. 나는 '앞집'으로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그분은 '루씨'로 기록했다.



이사


1년을 그리 알고 지냈으나 이사를 하게 되었다. 바로 현재의 공간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사한 곳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문자가 왔다.

"아지매  미워~~ 집에 가도  휑하니  동네가  썰렁해졌어요ㅠ"


"그렇지 않아도 어제 내내 생각났어요. ^^

그 술맛도 그립고 그곳도 그립고요. 화단은 멀쩡한지 궁금하고 걱정도 되고요 ㅋ

근데 맨날 외지에 계심서. 지금도 먼 곳에 계시지요?"


"비 오면 가잖여요. 지금  일하다  잠깐 쉬어요."

"그럼 비 오는 날 그쪽으로 들러야겠구먼요."

"아 참, 장미에 병와서  우리 거 하면서 약도 했어요^^  골목도 쓸어줘요^^"

"어쩐지 갸들이 멀쩡해서 이상하다 했네요 ㅋ"


내가 심었던 장미가 활짝 피니 내 생각이 난다고 하셨다. 공사 현장일을 하셔서 이번에는 다른 고장에 몇 달 계시게 되었다고 하신다.


지난해 장마가 계속될 때와 눈이 계속 올 때 일을 못 하고 쉬시던 생각이 났다. 날씨는 어떤 이에게는 생업과 직결된다.


올봄, 나의 첫 공방의 장미 사진을 찍어 보내셨다


꽃도 궁금하고 앞집도 궁금해서 그곳에 갔다. 달달한 맥*커피를 타 주셨다. 커피를 마시면서 길에 서서 함께 꽃을 봤다. 내 집 쪽의 넝쿨 장미의 가지치기를 해 주시고 장미에 병이 와서 함께 다 해 주셨다고 하셨다.


나의 공방은 현재 전세를 놓은 상태다. 자금도 부족해서 팔려고 했으나 상가는 5년이 넘지 않으면 가산세가 많이 나온다고 세무사가 말했다. 현재 거주자는 가든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내가 가끔 살펴야 하나 내 마음이 그곳을 떠나서 관리가 잘 안된다.


그런 나 대신 틈틈이 화초를 관리해 주시는 것이다.


종일 덕었다면서 비트를 주셔서 자주 마신다. 색이 곱다.


쉰다리 대신 호박죽


7월 어느 날


단호박죽 좋아합니까? 얼추 다 되었으니 한 그릇 퍼 가시지요. 하고 문자가 왔다.


지난해 앞집에서 해 주신 쉰다리(누룩 술)가 먹고 싶었다. 그런데 호박죽을 끓였으니 그릇을 들고 오라는 것이다. 호박죽을 통에 담아주시더니 뜨거울 때 맛보라면서 호박죽 한 그릇과 찐 감자를 주셨다. 맛있게 먹으니 생 자색 감자 몇 개를 또 싸 주셨다. 나는 처음으로 자색 감자를 먹어봤다. 집에 와서 쪄 먹었다. 자색 감자는 식은 후, 아침에도 그다음 날 저녁에도, 막 찐 감자처럼 맛있었다.

호박죽에 거두를 넣으면 더 깔끔하다고 한다. 부침개도 부쳐주셨다.

바로 앞이 나의 공방이다. 창 쪽에 재봉틀을 놓으시고 바느질을 하시는데 그럴 때면 나는 창 밖에서 말을 걸기도 했다. 오른쪽의 가방이 뭔지 여쭤보았다. 동네의 캣맘께서 15년 넘게 끌고 다니시는 가방이 너무 낡아 보여서 드리려고 사셨다고 한다. 이 동네에는 정말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아침과 저녁에 카트를 끌고 다니시면서 고양이를 돌보고 계신 분이 있다. 그러다가 아픈 새끼 고양이를 발견하면 동물병원에 데려가시거나 중성화 수술까지 해 주시기도 하신다. 이제 17년 되었겠다. 그분이 수레를 끌고 나타나시면 길 냥이들이 알고 나온다.


쉰다리


또 7월 어느 날


"굿모닝? 쉰다리를 했어요~~ 아직 숙성은 덜된 거 같은데 시간 나면 퍼가셔요~~ 넘 많이 했나 봐요. ㅋㅋ2리터 정도 되는 용기로 갖고 오셔요. 케잌은 덤입니다. ^^"


그날 몸이 아파 못 갔다. 후일 들어보니 그 케이크는 환갑이라고 딸이 사 왔던 케이크이라고 했다. 그냥 어디서 난 케이크이라고만 하더니......




"올봄에 주신 설란이 예쁘게 피었네요. 고마워요."하고 사진을 보냈다.

"잘 키워줘서 고맙네요." 하고 답이 왔다.

그 후에 만났을 때 설란이 맞지요. 물으니 '샤프란'이라고 말했다.

"아이, 그럼 그때 말해주시지 그랬어요."하고 내가 말하니 "설란이나 샤프란이나 어때요." 하면서 웃으셨다.


그녀는 사실 전주로 이사 오기 전에 시골에서 대형 비닐하우스에 원예를 하신 분이셨다. 꽃 박사다.


그럼에도 늘 겸손한 사람이다. 이쯤 되니 나도 뭔가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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