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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Sep 21. 2021

명절 아침, 사랑의 과일 바구니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자

'명절'이란 오랜 관습에 따라 해마다 일정하게 지켜 즐기는 날(한국문화민족 대백과)이라고 한다. '관습'은 그 사회 공동체가 요구하는 행동 규범에 해당한다.


관습에 의해 명절을 보내는 집안의 주부는 결혼과 동시에 '명절 우울증'을 경험하게 된다. 함께 모여 맛있는 식사를 한다는 점에서 즐거워야 마땅하다. 대백과사전에도 그리 나와 있지 않은가, '즐기는 날'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부당한  투성이다. 핏줄이 이어지지 않은 조상님의 제사까지 모셔야 한다. 명절 음식은 가짓수도 많다. 시어머님의 진두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서  번도    없는 요리를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 내야 한다. 주방기기가 익숙하지 않아 찾다가 마음 해지신 시어머님께 혼줄이 나는 경우도 많았다.


하필 9월 초에 결혼을 한 나는 결혼 후, 추석 전날 시댁에 갈비를 사서 기쁘게 갔다. 종갓집이라서 일손이 많았음에도 송편을 4시간 넘게 빚었다. 전을 몇 시간을 부쳤다. 손님이 연속해서 오셨다. 일을 하다 중간에 소반에 주안상이나 다과를 차렸다. 종일 일을 하고 나니 9시가 넘었다. 그제야 어머님께서 내가 사 간 갈비 손질을 하자고 하셨다.


그때 시댁은 시 할머님께서 아궁이 부엌을 고집하셔서 개량되기 전 형태였다. 그 해 보름달은 참으로 밝고 시렸다. 보름달을 보니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에 아이가 태어났고 명절은 나에게 더욱 힘든 시간이 되었다. 우는 아이 달래랴 일을 하랴 몸과 마음이 녹초였다. 며느리 중에 나 혼자 맞벌이 부부였지만 명절에 항상 최선을 다했다. 더 빨리 도착해 일도 열심히 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며느리 셋이 되자 나의 사랑하는 동서가 엄청난 보탬이 되어 주었다. 정말 고마운 존재다. 후일 아랫 동서는 나보다 먼 곳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도 더 빨리 도착해서 미안하고 늘 고마웠다.


시 할머님께서 돌아가신 후, 부엌을 고쳤다. 그리고 종갓집인 시댁의 어르신들께서 한분 두 분 돌아가셨다. 시 어르신들이 모이시면 40분이 넘게 가득한 방이 단 한분 오시게 되었다. 막내 작은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 우리끼리 제를 지냈다.


결혼 후, 일이 많으니 명절 전야에 시댁에서 잠을 잤다.  아이들이 고등학생 되면서부터 공부하는 아이들은 집에 두고 혼자 갔다. 명절 전날 일 마치면 집으로 왔다. 다음 날 명절 아침이면 새벽 6시에 일어나 시댁에 갔다. 아침 제사상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코로나 사태 이후, 바로 지난 설 명절에 시어머님께서 '제사는 지내지 말자'라고 선언하셨다.


관습이란 참으로 무서운 족쇄다. 어머님께서 그렇게 선언하셨음에도 놀러 다니는 것이 죄송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관습은 무의식마저 지배한다.


과감히 나 자신이 생각을 바꾸어야 행복해진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왔다. 그래도 명절 전야에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의 등대를 켜고 자유롭게 날다)

해마다 명절 아침이면 일어나던 바로 그 시간이 되었다. 6시에 나가려면 새벽 5시에는 눈을 떠야 했다. 오늘은 잠을 조금 더 자도 되련만 뒤척이다 결국 일어나 앉았다.


친정도 코로나 사태 이후 차례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어찌 보면 지구 대 재앙인 코로나가 우리 두 집안의 여성들을 '명절 우울증'으로부터 구제해 준 것인지 모른다.


따뜻한 마음의 나의 큰딸이 양가 할머님들께 과일을 보냈다. 전화기 너머 시어머님의 행복한 음성이 들렸다. "네가 잘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어머님은 말씀을 참 기분 좋게 하신다. 사과 한 박스와 샤인 머스켓 한 박스가 배달되었다고 한다.


"아빠가 바구니는 가격 대비 별로라고 그냥 박스로 하는 게 낫겠다고 하셨어." 하고 딸이 말했다. 양가에 택배를 보내면서 엄마 아빠 각자의 의견을 묻는 세심한 나의 큰딸, 아마 시어머님께서도 글자가 들어간 과일바구니를 더 좋아하셨을지도 모른다.


울 엄마는 손녀딸이 보낸 바구니의 리본 글자를 들고 사진을 찍으셨다. 망고가 이렇게 달고 맛있는 것은 처음 맛본다고 좋아하셨다. 망고 한번 사 드린 적이 없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나의 큰딸이 나보다 낫다. 오늘은 엄마 모시고 식사나 해야겠다. 시어머님께는 명절이 지나면 책을 택배로 부쳐야겠다. 어머님은 외로움을 책으로 달래신다고 하셨다. 생각해보면 '택배'라는 것이 있는데 직접 들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드린다는 것을 자꾸만 미뤘다. 갈 때는 또 잊어버려 놓고 갔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명절 새벽, 홀로 남으신 양가 두 분께서 덜 외롭기를 기도드린다. 그리고 나 자신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자고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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