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투수의 등판
결혼 초, 복잡한 촌수를 배우고 그에 맞게 부르는 것이 서툴고 힘들었다. 시댁의 친지들을 보면 그분이 그분같이 생겼는데, 다른 분이라서 당황한 적도 많았다. 나이 10살인 어린아이에게 '아저씨'란 칭호를 써야 하는 종갓집인 것을 알고 난감했다. 시댁은 제사를 지내는 날에 어르신들만 모이셔도 교자상을 여러 차례 차려야 했다. 어느 날 어른 숫자만 세어 보았는데 40명이었다. 그분들이 아이들까지 데려오셔서 사랑방은 아이들 손님으로 가득했다.
법적인 시댁의 친족관계에 붙이는 첫음절은 '시'자이다. '시금치'만 보아도 '시'댁이 생각나서 꼴도 보기 싫다는 지인도 있다. 다행히 나는 '시'자가 그리 싫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여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예쁜 '동서'때문이다. 얼굴도 예쁘지만 마음이 고와서 마구 자랑하고 싶다. 동서는 나의 시동생의 아내다. 영어로는 '나보다 어린 시댁 여동생 younger sister-in- law'이다. 촌수를 따지는 영어 단어가 따로 없고, 시댁은 그저 in- law를 붙이면 그만이다. 시누이도 'sister-in- law'라고 칭하는데 나이가 나보다 더 많으면 그 앞에 연장자임을 나타내는 elder를 붙인다. 나는 영어로 그저 그렇게 표현하는 방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의 동서에게는 특별히 '동서'라고 부르고 싶기 때문이다. 동서는 나의 삶의 구원투수다.
첫 대면 때, 동서는 가냘픈 허리에 고운 목소리를 지닌 모습으로 우리 집 현관문 앞에 나타났다. 말소리도 소곤소곤 듣기 좋은 동서는 결혼 후 아들 둘을 낳았다. 어문학을 전공했지만 큰 아들의 수학 공부를 가르치던 동서는 명 수학 강사가 되었다. 집에서 동네 아이들을 과외하는 선생님이 되었는데, 명 수학 강사라 칭한 이유는 동서가 학생을 맡으면 성적이 쑥쑥 올랐기 때문이다. 동서의 아이들은 모두 장성해서 한 아이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바로 취업을 했고, 둘째는 현재 대학생이다.
결혼 초, 우리가 같은 아파트에 살던 시절 현관 벨이 울려 나가 보니 동서가 음식과 선물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웬일이야? 오늘 무슨 날이야?"
형님, 아주버님 생신이잖아요.
나는 원래 건망증이 극심한 성향이다. 사실 내 생일도 거의 기억을 못 한다. 조금 있다 오라고 하고는 부랴부랴 상을 차려 동서네와 맛있게 저녁식사를 했다.
나의 둘째가 뱃속에서 이제 겨우 세 달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후두암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울면서 병원에 달려가 보니, 아버지는 음식을 열심히 들고 계시고, 엄마는 거의 초주검이 되어 계셨다. 누가 보면 엄마가 병에 걸리셨고, 아버지가 병간호하시는 것으로 오인할만한 상황이었다. 원래 엄마는 식성이 좋지 않으셨고, 아버지는 항상 음식을 맛있게 드셨다. 내가 편식이 없고, 식성 좋은 것이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여하튼, 그렇게 아버지는 '병원 음식이 맛이 없다'라고 하시면서 열심히 드시고 병마와 싸우고 계셨다. 임산부 직장인인 나는 아버지의 입맛을 더욱 돋아드릴 요리를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진즉에 지치셔서 입원을 하실 정도가 되셨고, 막내 여동생이 아버지의 병간호를 주로 했다.
형님~, 아버님은 어떠셔요?
자초지종을 들은 동서가 어느 날 병원에 찬합 도시락을 들고 천사처럼 나타났다. 따뜻한 밥과 소불고기, 그리고 여러 가지 나물 반찬들이었다. 아버지는 드시고 남은 것을 냉장고에 잘 넣어두라 하시더니 다음 식사로 나머지를 모두 드셨다. 그 후 아버지는 여러 치료를 받으시면서 암을 이겨내셨다.
나의 큰딸이 서울에 상경하여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에 나는 아무것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원룸이라도 구해줬어야 했는데, 학교 주변에서 깨끗하고 큰길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깨끗한 편인 고시원 비슷한 곳을 구했다. 밥만 밥솥에 해 놓는 형식으로 공용 식당이 있었다. 다행히 그 주변에 재래시장도 있고 반찬가게도 있어서, 아이에게 사 먹으라고만 했다. 그때 나는 대학원 공부로 너무 바빴다. 밑반찬이라도 잘해서 아이에게 자주 보내는 자상한 엄마가 될 수 없었다.
엄마, 작은엄마가 엄청 맛있는 고급 레스토랑 데리고 가 주셨어.
나의 동서는 일산에 살았는데 부러 서울에 와서 딸을 만나 밥을 같이 먹은 것이다. 반찬을 해 갈까 맛집을 데려갈까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나의 큰딸은 은근히 맛을 중요시하며, 새로운 곳의 탐방을 좋아하는 성향이기 때문에 맛집을 데리고 간 것 같았다. 큰딸이 여행 스케줄을 짜면 항상 맛집 위주의 코스를 계획한다.
이렇듯 동서는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을 베풀며, 나의 가족들에게 따뜻한 식탁을 여러 차례 차렸다. 내가 기억하는 특별한 일화와 관련된 것만을 적어도 이만큼이다. 나의 큰딸은 일본 유학 후 한국에 돌아올 때, 작은엄마에게 드릴 손수건을 선물로 사 왔다. 따뜻한 아이다. 자신을 사랑으로 보듬어 준 '작은엄마'를 잊지 않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다.
나는 동서에게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한다. 그래도 동서는 항상 내 편이 되어준다. 그런 나의 동서가 최근 갑상선 암으로 고생을 한 후, 과외를 하지 않는다. 동서는 내가 아는 가장 사랑스러운 신앙 생활자이다. 신앙으로 모든 것을 잘 이겨내면서, 힘든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동서를 위해 비 신앙인이 기도드린다. '항상 건강히 웃으며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는 후두암을 이겨내시고 이십여 년을 더 사신 후, 세간을 시끄럽게 한 가습기 살균제의 영향으로 폐의 일부가 굳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아버지는 나의 글 속에서 살아 숨 쉬시고 나의 마음에 남아계신다.
큰 아이의 첫 고시원 생활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1년을 그리 살다가 그 후 조금 숨이 쉬어질 만한 공간의 원룸으로 옮겼다. 둘째가 했던 말이 떠 오른다. "언니, 이제 소리 내어 통화해도 되니까 좋겠다." 고시원과 원룸의 가격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원룸을 구해 줄 만한 능력은 있었다. 나의 큰 딸은 엄마가 돈이 없어서 고시원을 구해 준 것으로 알고 아무 말 못 했다고 한다. 고시원에서 원룸으로 옮겼을 뿐이었는데도 좋아했다. 큰딸은 그 후, 몇 년을 더 혼자 원룸에 살다가 동생이 서울로 진학을 하면서 함께 투룸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시원은 정신이 온전하게 있기 어려운 곳 같다. 그때 큰아이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재수한다는 아이를 설득해서 등록을 마친 후, 처음 고시원에 아이들 두고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3시간 넘게 울었다. 아파트에 와서 생채에 밥을 비벼 먹는데, 밥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부유하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팠던 것은 나의 아이가 기거할 곳 하나 제대로 장만해 주지 못했을 때였다. 나의 시골 땅을 팔아도 구하기 힘든 아이들 기거할 공간, 서울의 월세방, 곧 계약이 만료되어 다시 집을 알아봐야 한다. 그때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부모가 된다. 아이들이 건강하기만 바란다.
지난 추석에 동서를 만나지 못했다. 나는 웃는 얼굴의 동서를 보고 싶었지만, 건강도 걱정되고 코로나가 극심하여 내려오지 않게 되었다. 설에는 웃으면서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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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자고, 입는 것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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