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을 다시 꺼내 본 어느 여름날의 기록
시간이 귀해진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몇 번이나 망설이게 된다. 되도록이면 좋은 영화를 보고 싶은 이유다. 그렇게 망설이다 결국, 오래전에 여러 차례 봤던 영화 한 편을 다시 꺼내 들었다. 스무 살에 봤던 〈흐르는 강물처럼〉. 그 시절엔 그저 젊고 아름다운 브래드 피트를 보기 위해 이 영화를 골랐던 것 같다. 이번엔 조금 달랐다. 아빠가 좋아하던 낚시에 꽂혀 다시 그때의 강가로 가게 되었다. 아빠의 시절, 아빠의 때를 만나고 싶었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낚싯줄을 따라 그 시절의 강가에 서 있었다.
햇살이 강가에 쏟아지고, 그곳에 젊은 브래드 피트도 서 있었다. 무모하고 반짝이던 청춘, 거침없이 물살을 가르며 미끼를 던지는 사람. 〈흐르는 강물처럼〉은 겉으로 보면 두 형제의 성장기이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이해할 수 없음, 사랑의 방식,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명상이 숨어 있다. 낚시는 영화 전체를 이끄는 중요한 메타포다. 아버지는 메트로놈을 켜고 시계방향 10시에서 2시 사이로 낚싯줄을 던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허공중에 부드럽게 움직이는 플라잉 낚시. 낚시는 가족 간의 대화이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무언의 이야기다.
이 가족은 몬태나주의 광활한 자연 속에서, 그 안에 나름의 질서로 살고 있다. 성실하고 신중하면서 계획적인 노먼과 자유롭고 반항적인 것이 매력인 폴은 신앙심 깊은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그들의 일상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낚시라는 침묵의 행위로 이어진다. 말없이 휘두르는 낚싯줄 하나로 아버지는 인생을 가르친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되, 흐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자연에서 신의 질서를 배우는 이 가족은 낚시를 하나의 신앙처럼 여긴다.
세월이 흘러 형제는 각자의 길을 걷는다. 노먼은 이성과 계획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폴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안고 무모한 아름다움 속으로 자신을 던진다. 그들의 삶은 엇갈린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사랑은 줄곧 평행선처럼 흐른다. 어쩐지 서로의 마음이 닿지 않는다. 각자 선택한 길 위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가장 아픈 순간은, 사랑하고 있음에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를 때다. 노먼은 동생을 구하려 한다. 그러나 끝내 그를 이해할 수 없다. 폴은 끝까지 자유롭고, 고독하며, 자신의 강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한 삶을 향해 불꽃처럼 돌진한다.
“사람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온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이 문장은 어쩌면 우리의 인생 전체를 꿰뚫는 말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의 나는 노먼보다는 폴과 닮아있다. 그러나 완벽히 폴이라고 볼 수도 없다. 어떤 날엔 노먼처럼 되기 위해 애썼고 또 다른 날엔 폴처럼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지나 오니 젊은 날은 빛나고 무모했고, 멈추지 않는 강물 같았다. 강가에 던진 낚싯줄 끝엔 물고기가 있는 날도, 없는 날도 있었다. 마흔여덟의 나는 폴 같은 마음을 품고 노먼과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더 오래 침묵하고, 보다 많이 기다리고, 되도록 한 발짝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이 되어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떤 시절의 내 시간은 참 아깝기도 해서 다른 시절의 내게 그 시간을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모든 시간은 그저 흐를 뿐이다.
다시 영화를 보고 난 밤, 나는 물끄러미 강물 사진을 들여다봤다. 사진 속 물살은 움직이지 않지만 그 안에서 내 삶이 이만큼 흘러온 것을 느낀다. 강은 변함없이 흐른다. 인간의 삶 또한 어디론가 흘러간다. 누군가는 말없이 낚싯대를 던지고 누군가는 물살을 거슬러 오르려 애쓴다. 인생의 절반쯤 와서 드는 생각, 모든 것은 가족으로부터 시작이다. 그래서 함께 할 수 있는 가족이 있고, 같이 할 수 있는 취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이 아닌가 싶다.
서로 다른 삶을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다. 모든 것의 끝엔 사랑만 남기 마련이다.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낚싯줄 때문이었다. 낚싯줄은 아빠와 연결된다. 아빠는 생의 끝자락까지 낚시를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늘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떠날 채비를 하셨다. 어느 강에서, 또는 바다에서, 계곡에서 그는 말없이 혼자 앉아 있었다. 그 오랜 시간,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참 외로웠던 사람이었겠구나 싶다. 우리 아빠.
로버트 레드퍼드가 처음 메가폰을 잡았을 때, 그는 자신의 젊은 날과 꼭 닮은 배우를 찾아냈다. 햇살 아래 빛나는 얼굴, 해사한 눈빛. 그렇게 브래드 피트는 영화 속 ‘폴’이 되었다. 90년대, 수많은 커피숍 벽면엔 그 영화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은 영화로 먼저 알려졌지만, 그 시작은 한 권의 소설이었다. 노먼 F. 매클린이 쓴 유일한 소설집, 그 표제작이 바로 이 영화의 원작이다. 매클린은 먼저 세상을 떠난 동생 폴과 함께 낚시하던 시간들을 기억하며 이 글을 써 내려갔다. 책의 첫머리엔 또 다른 문학가의 문장이 함께 한다. 〈브로크백 마운틴〉과 〈시핑 뉴스〉를 쓴 애니 프루가 쓴 서문은 소설만큼이나 조용하고 아름답다. 마치 오래전, 우리가 잃어버린 누군가를 부드럽게 다시 꺼내주는 손길처럼. 그 강은 여전히 나의 마음 어딘가를 잔잔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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