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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_가면을 쓴 인간

by 김상래

<내가 이 그림의 작가라고 생각하고 쓰는 글>

고이치로 타카기

작가노트

나는 이 그림을 통해 ‘가면을 쓴 인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호랑이는 힘의 상징이지만, 그의 몸은 어린아이의 옷을 입고 있다. 힘은 늘 아슬아슬하게 존재한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양은 순한 척 기도하지만, 그 안에는 조롱과 냉소가 숨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이런 장면을 마주한다. 겸손한 척하는 권력자, 진지한 척하는 연극,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 나는 그 풍경을 동물과 인간의 혼합된 모습으로 옮겨 놓았다.

문장에 리듬감을 준 것은 진리라는 것이 언제나 빙빙 맴돌 뿐 곧장 다가오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빛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빛은 어디에도 없다. 빛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뿐.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허위와 희극 속에서 우리는 계속 증언하고, 계속 연기한다. 언젠가는 그 가면을 벗고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호랑이는 바위 위에서 한 발로 서 있다. 그는 으르렁거리며 균형을 잡고 있다. 누구나 그 균형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몸은 어린아이 같은 반바지와 셔츠 차림인데 얼굴은 사납고 위엄 있는 호랑이. 그 부조화 속에서 나는 묘하게 웃음이 난다. 동시에 어떤 긴장도 느낀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다르지 않다. 외양은 위엄을 뽐내지만, 그 속에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함이 숨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누군가는 강한 척, 누군가는 순한 척. 호랑이 탈을 쓴 어른이든, 양 탈을 쓴 사람이든 결국 본모습은 감춰진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늘 역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학생답게, 부모답게, 상사답게. 마치 무대 위에서 배역을 맡은 배우처럼 우리는 표정을 흉내 내고 몸짓을 만들어낸다. 그 흉내가 익숙해질수록 본래의 얼굴은 희미해진다.


맞은편의 양을 보자.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나, 혀는 살짝 삐져나와 있다. 신실함보다 조롱에 가까운 몸짓이다. 그렇다. 인간의 많은 행동은 진심보다 연기에 가깝다. 누군가를 존경하는 척, 믿는 척. 그러나 그 사이로 작은 혀처럼 본심은 튀어나온다. 완벽하게 숨길 수도, 완벽하게 진실할 수도 없다. 우리는 늘 그 중간 어딘가에서 머문다.


인간은 왜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살아가려 하는가? 두려움 때문이다. 본모습이 드러날 때 받을 비난과 외면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호랑이가 되고 싶어 하고, 양처럼 보이려 애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위대한 순간은 가면을 썼을 때가 아니라 벗었을 때 찾아온다. 서로가 솔직하게, 꾸밈없는 얼굴로 서 있을 때.


세상은 넓고 갈 길은 멀다.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데 온 힘을 쓰기에는 우리의 시간은 짧다. 호랑이가 무너질까 긴장하며 지켜보는 대신, 혹은 양이 정말 순한지 의심하며 조롱하는 대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지혜롭다. 누가 더 빛에 가깝냐고 다투는 대신, 서로가 품고 있는 작은 불빛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인간다움에 가까운 태도다.


자연 앞에 서면 이 모든 연극은 사라진다. 구름은 우리를 평가하지 않고, 산은 우리의 위엄을 기억하지 않는다. 바람은 가면을 쓴 얼굴과 벗은 얼굴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 앞에서 인간은 그저 작은 미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사소함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우리는 거대한 존재가 될 필요가 없다. 빛 그 자체가 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가면을 쓴 존재이고, 동시에 그 가면을 벗고 싶어 하는 존재다. 호랑이처럼 위엄을 흉내 내다가도, 양처럼 순한 척하다가도, 결국에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게 된다. 그 순간, 가면은 무력해진다. 남는 것은 솔직한 인간의 얼굴뿐


결국 우리는 거대한 자연 속에서 스쳐가는 한 점일 뿐이다. 그 짧은 순간에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본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다운 빛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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