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어떤 하늘을 품고 사나요?

#초현실주의화가 #르네마그리트

by 김상래
르네 마그리트 〈상류사회La Belle Société〉(1965 ou 1966) 81 × 65 cm 캔버스에 유화

마그리트와 함께 쓰는 일상의 찬가

영국의 화가 컨스터블이 그린 구름을 보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자연의 생명력을 예찬했다. 캔버스 위에서 살아 움직이던 빛과 공기는 나에게 바깥세상의 경이로움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벨기에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상류사회>를 보고 있으면 문득 단조로운 나의 일상이 비현실적인 동화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경계 너머의 숲, 그리고 내 안의 하늘

그림 속에는 중절모를 쓴 남자의 실루엣이 서 있다. 그의 뒤편으로는 빽빽하고 싱그러운 푸른 숲이 펼쳐져 있다. 흔히 세상 밖에 나가야 탁 트인 하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고정관념을 뒤집었다. 세상 밖은 온통 푸른 숲의 질서로 가득하고, 정작 드넓은 하늘과 뭉게구름은 남자의 내면에 들어와 있다. 마그리트가 즐겨 쓰던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이다. 익숙한 사물을 엉뚱한 맥락에 놓아 생각의 틀을 깨는 힘.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것의 명확한 경계가 있는 삶,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시간표. 그것이 그림 배경의 빽빽한 숲이라면, 정해진 일과 속에서 글을 쓰며 사유하는 나의 시간은 중절모를 쓴 남자 안의 광활한 구름이다.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듯한 그 고요한 시간은 나를 텅 비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처럼 큰 세상으로 채운다.

남자의 허리 언저리, 돌담 위에 놓인 차가운 회색 구체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마그리트의 작품에서는 종종 ‘방울’이라 불리지만, 내 눈에는 마치 흑백으로 그려진 포켓몬스터의 볼처럼 보인다. 그림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주 작은 볼 안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커다란 판타지 세계가 압축되어 있을 것만 같다. 그 작고 단단한 틈새 너머로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올해 내 앞에 놓일 일들이 저 작은 볼 안에 모두 담겨 있는 것만 같다. 아직 뚜껑을 열어보지 않았기에 그 안에는 무엇이든 들어있을 수 있다. 판타지를 좋아하는 아이의 마음도 어쩌면 저 볼처럼 커다란 세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을 통해 우주를 상상하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나는 비로소 일상의 사소한 조각들이 품은 거대한 무게를 실감한다.

자발적인 조율, 아이가 그려낸 인생의 지도

최근 아이의 모습을 보며 마그리트가 캔버스 위에 배치한 정교한 질서를 떠올렸다. 한 주간의 여행 후, 밀린 수학 공부를 따라가는 것이 아이에겐 꽤나 버거운 숙제였을 거다. 아이는 포기하는 대신 스스로 운동할 시간, 공부할 시간, 기타 학원에 갈 시간을 짜서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선생님이 써 주신 한 해의 노력에 대한 평가는 아이가 얼마나 자발적으로 자기만의 시간을 만들어왔는지에 대한 지표였다. 마그리트가 단순히 기분에 따라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철저한 논리로 화면을 구성했듯, 아이 또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시간을 차근차근 매만지고 있었다.

하루의 일과를 적어 내려가는 나의 습관, 선택과 몰입으로 자기 일을 해내는 남편의 모습이 아이라는 거울에 투영되어 하나의 아름다운 화음(Harmony)을 만들어낸다.

비어 있기에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자유

정해진 게 없다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쓰며 문장을 한 대목 한 대목 곱씹다 보면, 마그리트의 그림 속 텅 빈 실루엣은 비로소 나만의 의미로 가득 채워진다. 만약 중절모를 쓴 남자가 짙은 검은색 옷을 입고 서 있었다면 나는 그가 가슴 속에 저토록 넓은 하늘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영영 알 수 있었을까. 내가 매일의 일상을 글로 적고 때마다 읽으며 고쳐 쓰는 이유는 어쩌면 내 마음의 실루엣을 맑은 하늘로 닦아내는 성스러운 의식일지도 모른다.


세상 밖은 여전히 푸른 자연으로 가득하고, 내 안의 세계는 그보다 더 넓은 창공을 품고 있다. 글을 쓰며 나의 세상을 조금씩 넓혀가는 이 과정이 참으로 좋다. 억지로 무언가를 채우려 애쓰지 않아도, 평온한 마음으로 자판을 두드릴 때 구름은 자연스레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행복의 파랑새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아이가 스스로 세운 계획표 위에, 남편의 몰입 속에, 그리고 내가 매일 아침 적어 내려가는 일과 속에 행복은 늘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방학 첫날, 단잠에 빠진 아이의 방문을 가만히 닫아둔다. 아이가 깨어나면 “네 마음속 포켓볼 안에는 어떤 것이 들어있을 것 같니?”라고 물어보고 싶다. 아이가 품은 커다란 세상을 온 마음 다해 응원하며, 나 또한 내 안의 하늘에 더 맑은 구름 한 점을 띄워 올린다.

아이가 일어나면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미술관 나들이를 함께 떠날 생각이다. 아이와 나란히 서서 관람하는 작품들은 또 어떤 빛깔로 다가올까. 나는 어떤 그림 앞에서 한참을 머물게 될지, 아이는 어떤 이야기들을 조잘거릴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방학의 첫 페이지를 예술로 채울 생각에, 기분 좋은 설렘이 아침 공기를 타고 마음을 간질인다. 모든 것이 참으로 평온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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