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메이르의 거리와 우리의 방학
페르메이르의 거리와 우리의 방학
곧 중 3이 되는 아이가 내게 노래 두 곡을 추천했다. 그린데이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와 잔나비의 '마더'. 처음 아이가 음악을 추천해 주었을 땐, 그저 취향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마냥 기쁜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이 곡을 내밀며 "이건 보컬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곡이래"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그린데이는 내가 대학 시절 즐겨 듣던 밴드가 아니었던가. 세월을 돌아 내가 듣던 밴드의 노래를 이제는 훌쩍 자란 아이에게 '아버지를 기리는 곡'이라는 설명과 함께 역으로 추천받다니.
"7년이 참 빨리도 지나갔네요. 9월이 지나면 나를 깨워주세요(Seven years has gone so fast.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읊조리는 빌리 조 암스트롱의 목소리와 이어진 잔나비의 마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한가로운 날에 살기를-
언젠가 스치울 늦여름 바람엔 니가 웃어주었으면"이 어쩐지 마음 한가득 눈물폭탄을 실어 왔다.
아이의 선곡은 너무나 어른스러웠고, 그만큼 나를 정확히 알고 위로하고 있었다. 아이와 이런 깊은 정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나의 슬픔과 상실의 결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결국 옷의 솔기처럼 늘 하나이기에 아이는 이 노래들을 통해 남들보다 조금 일찍 생의 유한함과 그 뒤에 남겨진 사랑의 무게를 배우며 자라겠구나 싶어 노래를 추천하고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한결같이 아이 같으면서도 다른 아이들처럼 보채거나 조르는 일이 없다. 내가 저만할 때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아 부모님을 졸라대던 것에 비하면 아이의 어른스러움이 늘 나를 놀라게 한다. 아이는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아빠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아빠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 엄마는 아빠와 여행 다녔던 추억을 반추하며 사시고, 나는 당귀를 따서 삼겹살을 구워줄 테니 얼른 오라던 아빠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현실에 문득문득 발이 묶일 때가 있다. 근거리에 농수산물시장을 두고도 철마다 소래포구에 다녀와 딸들과 먹겠다며 차 트렁크 가득 해물을 실어 오던 아빠. 사과나무와 매실나무를 잔뜩 심으며 자식들 입에 들어갈 걸 미리 기뻐하던 아빠. 삶에 그토록 부지런했던 분이 세상을 떠나는 일조차 이토록 부지런히 해치우고 가버리실 줄은 몰랐다.
아빠 생각이 날 때면 나는 아이에게 혼잣말처럼 내뱉곤 했다. "이런 날엔 할아버지가 꽃게를 사 와서 가족들을 다 불렀을 텐데. 할아버지가 없으니까 삼겹살 먹을 일도, 흙을 만질 일도 없네." 아이는 그 무심한 그리움을 마음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노래와 엄마를 향한 헌사를 내밀며 나를 토닥인 것이다. 부모님과의 추억이 델프트의 운하처럼 잔잔히 밀려온다.
상실을 다독이는 일상의 뼈대
아이와 각자의 공간에서 서로의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지금의 풍경을 보고 있자면, 네덜란드의 거장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델프트 작은 거리의 집들>이 떠오른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런 마음의 갈래들이 정리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1658년경 제작된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최고의 걸작중 하나이다. 그림 속에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평범한 가옥이 등장한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골목 안쪽에서 누군가는 바닥을 닦고, 집 앞 계단에 앉은 여인은 고요히 바느질에 몰두한다. 아이들은 길가에 엎드려 자기만의 놀이에 빠져 있다.
이 그림이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깊이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속에 흐르는 '일상이 주는 신성함' 때문이다. 베르메르는 창틀의 낡은 벽돌 질감과 집 안으로 스며드는 은은한 빛, 그리고 자기 일에 몰입한 사람들의 평화로운 순간을 포착했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이 정적인 순간이야말로, 상실의 슬픔을 이겨내고 삶을 지탱하게 하는 가장 단단한 뼈대라는 것을 화가는 말하고 있다.
아이의 방학, 각자의 고독이 만나는 아름다운 선순환
아이는 어느덧 자라 내가 책과 음악을 추천하던 단계를 넘어, 역으로 내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예술가에는 늘 뮤즈가 있듯, 결이 맞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구가 늘 곁에 있는 느낌이다. 친정엄마는 늘 나보고 '자식 복'이 많다고 하신다. 긍정적인 엄마의 덕담이기도 하겠지만, 현상을 파고들기 좋아하는 나의 기질로 보아도 아이와 나의 '결'은 참으로 조화롭다.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의 내면을 그만큼 깊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방학을 맞은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은 베르메르의 그림처럼 평온하다. 아이는 할 일을 마치고 친구와 헬스장에 다녀오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면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내 자리에서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다듬는다. 글을 쓴다는 건 생활의 선순환을 가져온다. 내 삶을 나의 의지대로 끌고 간다는 것. 쓰는 사람만 아는 이 담백하면서도 치명적인 맛은 뭐랄까, 마치 위스키와도 같다. 맛있는 술을 좋아하는 신랑은 종종 위스키를 마시곤 하는데, 위스키의 매력은 오묘하다. 처음 혀끝에 닿는 독한 알코올의 기운이 지나가고 나면, 어느새 입안에는 고급스러운 진액이 남아 입안 전체를 싱그러운 소나무 밭으로 바꾸어 놓는 듯한 짙은 풍미를 남긴다. 글을 쓰는 것도 그렇다. 처음 하얀 화면을 마주하는 고통은 독주처럼 목을 태우지만, 그 고비를 넘겨 문장을 완성해 나갈 때 느껴지는 정신의 청량함은 내 삶 전체를 푸른 소나무 숲으로 변화시킨다.
사실, 백지가 전혀 두렵지가 않어! 글쓰기를 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인지, 애초에 잘 쓰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아서일까 그저 쓸 이야기들이 무진장 쏟아질 뿐.
남편이 출근한 뒤 아이가 깨기 전까지의 조용한 시간은, 침잠된 공기 속에서 사유의 향이 가장 짙게 배어 나오는 '위스키의 첫 모금' 같은 시간이다. 이 밀도 높은 시간에 글을 써 두어야만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가족들과의 만남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다. 생활에 밀착되어야만 시간을 벌 수 있고, 그 벌어들인 시간은 다시 글의 재료가 된다.
우리가 기억할 '어린 시절의 따뜻함'
나는 아이에게 어떤 엄마로 기억될까. 내가 부모님을 떠올리며 느끼는 그 따뜻한 공기를 우리 아이도 훗날 느낄 수 있을까. 왁자지껄한 집안에서 늘 조용한 것을 찾던 어린 날의 나처럼, 내 아이도 지금 이 고요한 집안의 분위기를 사랑하고 있을까.
베르메르가 <델프트의 작은 거리>를 그릴 때 사용한 세밀한 붓 터치처럼, 나 역시 오늘의 일상을 정성껏 기록한다.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할 일을 알아서 하는 이 책임감 있는 자유가 서로에게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어디에 마음을 쏟아야 할지 늘 고민하며 살 일이다.
아이가 추천해 준 음악 덕분에 다시 펜을 잡는다. 몰입의 즐거움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된다. 아이와 함께하는 이 '함께 또 따로'의 방학 풍경이 훗날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베르메르의 그림처럼 변치 않는 잔잔한 평화로 기억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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