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떠오르는 사람은 의문사 1호 서울대 최종길 교수, 그리고 윤형근 화백. 1973년 유신정권 아래 중앙정보부는 애먼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을 했다. 고문을 하다가 죽으면 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자살로 위장했다. 그렇게 가족들은 오랜 시간 동안 연좌제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되는구나.’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정신병원에 스스로 들어가 그간의 일들을 2주간 상세하게 기록해 98페이지 기록물로 남겼다. 최종길 교수의 아들 최광준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아버지가 갔던 길을 걸어 경희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자 애썼다.
반면, 고문을 했던 사람들은 죗값도 받지 않고 사과도 없이 버젓이 살아 있던 시대. 그 시대에는 올곧은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거나 고문으로 인해 불구가 되거나 정신줄을 놓기도 했다. 그곳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 나와 인생을 비극 속에 그림으로 승화시킨 사람이 있다. 분노의 붉은 기둥. 역사를 정면으로 부딪쳐 살아낸 사람의 그림에는 깊이가 있다.
혼자 생각하기를 한국의 마크 로스코. 단색화의 1세대, 표현주의 추상화가 윤형근.
김환기 화백이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있던 당시 윤형근은 그의 제자가 됐다.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안에 반대해 제적당하고 그 사건으로 반공단체 보도연맹이라는 곳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명동백작의 많은 문인들 역시 같은 시절을 겪었다) 전쟁 당시 피난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6개월을 복역했다. 숙명여고 교사로 있을 때 부정 입학한 학생의 비리를 문제 삼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때 부정 입학한 학생이 중앙정보부 간부급 딸이었다고 한다. 교사직을 박탈하는 조건으로 풀려난 그는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분노를 붓에 담아 거대한 기둥으로 내리꽂았다. 그 시기는 최종길 교수가 의문사를 당한 1973년과 같다.
화려한 색채로 커다란 캔버스를 채우던 윤형근 화백의 그림이 색을 잃은 이유는 오랜 세월 역사에 찌든 그의 인생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이다. 침묵과 고요, 극도의 단순함.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게 내 나이와 같은 마흔다섯이었다. 어쩌면 교사직을 박탈당해 우리는 그의 굴곡진 현대사를 날것으로 볼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시대의 비극이 그에게 가닿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작품들.
진리에 생명을 거는 것. 품격 있는 생각을 가진 자의 품격 있는 그림. 인간은 우선 바로 서야 한다. 작품은 그 사람의 흔적이고 분신이 돼 현실을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다.
한두 장은 거짓으로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그림이든 글이든 계속하면 자신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는 주변의 수많은 정보와 자극에서 나만의 기준을,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지 새삼 느끼게 만든다. 윤형근 화백의 작품을 보며 역사의 무게를 짊어진 그의 침묵이 와닿았다. 그리고 내 나이 마흔다섯.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나이 마흔다섯. 묘하게 얹어 본다.
요새 나는 명동백작과 윤형근 화백에 빠져 있다. 그래서 어딘지 허무감이 들기도 하는 아침 단상을 한낮에 끄적끄적.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된다.
_1990년 일본 우에다 갤러리 개인전 작가 노트 중
윤형근 1928년 4월 12일, 충청북도 청원- 2007년 12월 28일 사망
학력 홍익대학교 서양화 학사
수상 1990년 제1회 김수근 문화상 미술부문 1978년 한국미술대상전 대상
경력 한국미술협회 고문 1990~1992 경원대학교 총장 제7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