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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Aug 10. 2021

아이를 기다리는 한 시간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창가의 젊은 여성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창가의 젊은 여성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새벽 4시 기상이던 모닝 루틴은 여름이 되며 가차 없이 무너져 내렸다. 예쁜 이름 모닝. 그래서 굿모닝인 모닝 페이지 끝말. 그래. 아침에 적으면 모닝 페이지인 거지. 7시 이후 기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다. 까만 밤에 잠들어 뒤척이던 여름. 봄보다 더 자고 늦게 일어나 앉아도 어쩐지 개운치가 않다. 운동 없이 버티지 못하는 체력이 밉다. 밉다. 밉살맞아 죽겠다. 그래서 가을 운동을 결심한다. 더불어 간헐적 단식이라는 것도 해볼 요량이다. 코로나가 나를 채소만 먹어도 찌는 체질로 만들었다고. 코끼리도 채소만 먹고 그 덩치라고 신랑은 늘 얘기한다. 마른 몸을 찌워주겠다던 그분은 어딜 가시고 이제는 다이어트는 언제나 할 거냐는 신랑. 그래도 밉진 않다. 연애 3년, 결혼 11년 차, 미운 시기를 지나왔으니.


유한이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고 혼자 앉은 카페에서,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며 뭐라도 쓰고 싶은 손가락과 두서없이 떠오르는 잡념을 놓지 못해 거북이 목으로 앉아 있다. 나는 작가로 살 수 있을까? 고작 100일 글쓰기로 출간 작가들을 부러워하기엔 들인 노력이 너무 적잖아. 그들은 몇 년을 글을 썼다고 하잖아. 몇 편의 글로도 출간제의가 왔다는 작가를 보고는 이러고 있다. 역시 난 그 정도는 아닌 거야. 멀었다 멀었어. 브런치 구독자 수가 이제 고작 68명. 브런치 작가가 한방에 된 터라 은근히 출간제의를 기대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5월 10일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그때를 생각하면 68명의 구독자는 감사한 숫자가 맞다. 블로그 역시 오고 가는 이웃님이 정해져 있지만 내 성장에 함께 하는 분들이라 생각하면 굉장히 소중하다. 내가 성격상 살갑게 잘하지는 못한다. 대신 의리 하나는 진국이라고나 할까? 하하


출간 기획서를 쓰자고 앉으니 어떻게 써야 할는지 눈앞이 모두 빈칸. 아니, 반대로 쓸 얘기들은 너무 많은데 자랑처럼 느껴질까 봐서 많은 문장을 블록 처리해 지워나간다. 한 줄, 두 줄 지울수록 내가 사라지는 느낌. 내 인생이 지워지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아려오기도 한다. 그동안 많은 것들을 시도했는데 시도 끝에 된 게 없다고 써야 할까? 아니면 많은 경험 끝에 이제는 글을 쓰자고 결심했다고 할까? 방향을 잡고 적어나가면 그대로 끝날 일을 가슴에 돌덩어릴 하나 얹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시간. 누군가는 이 시간에도 투고했겠고 어떤 이는 선택받고 또 다른 이는 선택받지 못한 자신의 글이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시간. 나는 아이 학원 앞 카페에서 출간 기획서는 적지도 못한 채 허공 중에 분해될 시간을 나누어 적어가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일은 작가가 되는 것과 다른 걸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작가가 되는 것도 글 쓰는 일일진대 나는 더 작가가 되고 싶다. 쓰고 싶다는 생각. 쓰고 있는 행위. 할 말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는데 그걸 모른 척할 수가 없어 여전히 끄적인다. 아직 찾지 못한 내 말과 문장들. 끄적임이 길어질수록 내 문장이 생기겠지. 손가락을 움직여 쓰고 있는 행위 자체로 아무것도 아닌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로 느껴질 수 있다니 나는 더더욱 쓰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빠르게 흘러가는 내 시간을 허망하게 소비하고 싶지 않다. 뒤돌아서면 잊힐 지금을 악착같이 붙들고 싶다.


매일 쓰고는 있다. 노트에 휴대폰에. 정확히 내 휴대폰 채팅 창에. 내게 말 걸듯 생각나는 건 무어든 적고 있다. 블로그에 정리해 올리지 못한 글. 그래서 듬성듬성해져 버린 100일 그림 에세이. 그 며칠을 반성해본다. 꿈을 접은 건 아니었고 피곤함을 안은 여름을 지냈을 뿐이라고. 그래도 꼬박꼬박 굿모닝을 한 나를 격려해야지. 이따금 나는 왜 이러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지하 암반수 깊숙이 잠들어 있던 무기력이 그나마도 버티고 있는 나를 끌어내리려 할 때 나는 그래도 매일 모닝 페이지를 적고 있고 그 시간대가 비록 늦어진다 해도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곤 한다. 시골에서의 삶을 꿈꾸는 것은 이렇듯 꽉 짜인 스케줄을 소화하기 힘든 내 성향 탓일까? 한때는 나도 남들이 보기에 참 알차고 성실한 삶을 살았던 적이 있었다. 살다 보니 나는 그게 힘든 사람였던 거다. 개미처럼 사는 것보다 베짱이처럼 살아가는 게 나는 더 맞는 사람이다. 하루는 성실하되 인생은 좀 설렁거리게 사는 그런 사람.


신기한 건 글 쓰는 일만큼은 성실해지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인생 2막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딱 두 개만 생각하고 있으니. 따지고 보면 가장 성실하게 해왔던 거고 오래 했던 일이 그림을 그렸던 일,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끄적거리던 경험. 뭐라도 찔러 넣으면 바로 열리던 감춰지지도 않을 자물쇠 일기장에 일기를 쓰면서 차곡차곡 나를 쌓아온 건 아닐까. 시크릿의 기적을 맛보려면 끈질기게 적어야 한다. 지금의 불안을 참고 더 긴 거리를 움직여야 한다. 내가 지나온 묵묵한 어둠의 시간들이 언젠가는 빛날 날이 올 거라 확신한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나는 글을 적기 시작했고 치유의 단계를 거쳐 작은 도전을 하고 또 성취감을 맛보고 있다. 가다 보면 알게 되겠지. 적어도 난 웹디로 10년 이상 있었고 그 경력으로 고급 단가를 받던 사람이었으니까. 10년. 그래, 100일이 아니고 10년 이상 길게 봐야 하는 거다. 10년쯤 됐을 때 나를 가격으로 책정할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문장, 내 솔직한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누구를 위한 글쓰기가 아닌 나를 위해 시작한 글쓰기가 장독대 안의 된장처럼 무르익었을 때 나처럼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치유의 힘이 돼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내 삶에 들어온 글을 대하는 자세, 헛되지 않았다 생각하면 내 문장의 색깔이 더 선명해지지 않을까? 내 삶의 색깔이 더욱 짙어지리라.


정신을 깨우고 심장을 뛰게 만들기 위해 카페인을 들이켰다. 샷 하나를 덜아내고도 쿵쾅거리는 심장. 덕분에 카페에서의 1시간이 알찼다. 뭐라도 적어내고 있었으니 값진 1시간, 값진 카페인.


티브이를 사랑하지 않던 내게 재미를 주던 올림픽은 여름의 끝자락에 막을 내렸고, 아침. 저녁 선선해진 바람을 느끼며 봄날에 적어가던 내 꿈의 장막은 다시 걷어 올려졌다. 육상에 우상혁 선수, 클라이밍에 서채현 선수, 근대 5종에 전웅태 선수의 앞날을, 그들이 꿈꿀 미래를 나도 함께 꿈꿔본다.

그리고 함께 응원한다.

젊은 청춘의 날이 창창하듯 중년을 향해 가는 내 앞날도 그러하리라고.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í ]
1904.5.11. ~ 1989.1.23.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스스로를 천재라 부르던 광기 가득했던 화가는 '창가의 젊은 여성'이라는 작품에 그의 여동생 안나 마리아 달리를 그려 넣었습니다.  1921년, 살바도르 달리가 16살 때 유방암으로 떠난 어머니를 대신해 1934년 달리가 결혼할 때까지 그의 뒷바라지를 해줬던 여동생이라고 하네요.

사실 이 그림은 근 2년을 찌워가며 살고 있는 저를 보는 듯해 가져와 봅니다. 코로나가 선사한 묵음의 시대를, 저는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집안에 갇힌 신세지만 언젠가는 드넓은 대양을 다시 보러 갈 기회를 꿈꾸며 서 있는 저 자신 같이 느껴지는 그림이었어요. 익히 알고 있는 녹아내리는 시계를 그린 '기억의 지속' 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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