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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Nov 19. 2021

파랗고 빨갛고 투명한 나를 만나는 시간

장욱진/ 나무와 새 (1957)

장욱진/ 나무와 새 (1957)

모처럼 햇살이 반짝 거리는 아침. 하늘 가득 오랜만에 나온 양 떼들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시간. 아이를 등교시키고 테이블 앞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본다. 어지러웠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음악을 골라 틀어두는 일로 내 시간을 열어간다. 내게도 갱년기가 시작되는 걸까? 어쩌면 이미 진행중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온몸에 열이 ‘훅’하고 올랐다가는 어느덧 뒤통수가 서늘하게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가슴이 방망이질 치다가는 아침밥도 못 먹은 것처럼 기운이 쭉 하고 빠진다. 노화 진행도 빠르더니 이게 뭐 좋은 거라고 갱년기까지.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그러는 사이 내 몸은 그 보다 더 빠른 속도로 노화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엄마 없이도 몇 시간씩 있는 일이 자연스럽게 찾아온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오는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나도 나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엄마, 요즘 할머니보다 더 나이 들어 보여. 주름도 많이 생겼고 흰머리도 많이 늘었어. 요즘 너무 많이 일하는 거 아니야? 너무 힘들면 안 돼.”

“유한아, 엄마 나이 들어 보이니? 주말에 염색해야겠네. 글을 쓸 때 팩도 하나 붙이고. 엄마가 또 가꾸면 금방 괜찮아지잖아. 엄마도 다 계획이 있어. 기다려봐. 급한 일 끝나면 관리도 좀 하고 운동도 해야지.”


구름이 흘러가듯 아이에게 말을 뱉어내고는 내심 마음에 담아둔다. 아이가 크는 동안 너무 나이 들어버리면 곤란한데.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이 옆에 있어주고 싶은데. 이제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인데... 푸른 잎사귀가 둘러싼 가족사진을 들여다본다. 왼쪽 엄지발가락을 꼭 오므리고 있는 2살 아이의 인형 같은 모습과 세상 행복을 다 가진듯한 서른여섯의 젊은 내 모습, 고된 마음보다는 사회생활에 설렘을 품고 아이의 꼭 잡은 손을 마냥 신나 하는 신랑의 모습을 한참이나 들여다본다.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더 곁에서 지켜줘야겠구나. 아이가 힘들어하면 그런 날은 하고 싶은걸 하면서 시간을 보내라고 해주고, 일이 많아 늘 야근인 신랑에게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더 해줘야겠구나. 아무리 바빠도 하늘을 보고 가족사진을 보는 일을 잊으며 살면 안 되겠구나. 내게 주어지는 기회의 시간을 늘 감사하게 써야겠구나. 바쁘지만 일부러라도 여유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겠구나. 매일은 아니겠지만 이런 시간만큼은 꼭 챙기면서 살아야겠구나.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자니 까치둥지가 하나에서 셋이나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길을 지날 때 하늘을 보다가 만나는 새 둥지는 어떻게 지어졌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집 앞 소나무 둥지는 초기 공사부터 차근히 봐왔다. 좌측 가장 크고 높은 소나무에 거대하고 튼튼한 둥지를 짓더니 어느덧 먹이를 물어오고 식구가 여럿으로 늘었다. 그렇게, 나무 하나 건너에 제법이나 듬직해 보이는 둥지 2호를 1호보다 낮은 곳에 만들었다. 그러던 것이 비어 있던 가운데 소나무에 3호가 탄생한 걸 보고 있다. 집 앞 도로엔 차량이 많이 다니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우리 집에서 물과 햇살만으로도 잘 자라는 작두콩처럼, 까치들이 터를 일구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침나절이 잔잔한 호수 같이 펼쳐진다.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로 일어난다. 가만히 바라보는 세상의 작은 움직임과 내 마음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어제와 다름을 발견한다. 천둥, 번개,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까치의 터전을 보며 가족이 마음을 졸이던 비 오는 날이 있었다.


“바람이 엄청나네. 둥지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길래 이런 바람에도 끄떡도 없는 거야? 대단한 건축가야. 우리 이다음에 한옥도 저 까치한테 지어달라고 해야겠다.”


가족을 위해 세상 튼튼한 집을 지은 까치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내 마음이란 것도 어떤 역경에도 흔들림 없이 견고하면 얼마나 좋을까? 20대의 나와 30대의 나. 그리고 40대,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본다. 오랜만에 여유를 가져본다. 애쓰면서 사는 인생이라는 게 어디로 흘러가는지 도무지 알 길이 막막했던 때를 떠올린다. 주도적인 삶을 살고 있는 줄 알면서도 온전히 내 삶의 주인이었나 생각해보면 그도 아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살고 있다’라고 했다. 무슨 말일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마음이 허한 삶을 일컬어한 말이 아닐까? 재미있게 살아본다고 애쓰던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안정적인 수입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일까? 50이 되고 60이 되어서도 하고 싶은 일 일까? 그때도 할 수 있는 일 일까? 늘 되뇌 한다.  내 길을 꼭 찾으리라는 마음으로.


동생들은 셈이 빠른 편이다. 우리 집 앞 까치처럼 부동산을 1호, 2호, 3호 잘도 늘리고 그걸로 수익을 내고 있다. ‘셰어 하우스’도 몇 군데를 운영 중이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 놓고는 임장을 다니기도 한다. 경매에 참여해 몇 번을 패찰 하면서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며 신나 한다. 세상 재미있는 일이라며 부동산 관련 책을 읽고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기 위해 투자비용도 아끼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게 참 신기하다. 반대로 동생들은 나를 신기해한다. 어릴 때부터 셈에 약해빠진 나는 좋아하는 게 동생들과 많이 달랐다. 부자가 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도 부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분야에 접근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같이 공부해보자며 나를 설득하던 동생을 앞에 두고 연신 하품을 해댔다. 도무지 무슨 얘길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


나는 그저 내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내게 맞는 옷을 입고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차차 하던 일에서 성과도 나고 수입도 생기겠거니 한다. 문화. 예술에 관련된 일이 나는 참 좋다. 사람은 자기 좋은걸 하고 살아야 한다.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이 끄적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즐겁다. 아이들은 내게 그런 세상을 선물해준다. 아이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싶다. 나를 알아간 아이들은 어른들의 옷을 천천히 덧입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실수해도 괜찮고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믿어주고 격려해주고 싶다. 아이에게 내가 치유받듯 아이들에게 치유의 힘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내가 배움을 멈추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내게 있는 어떤 것들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르는 게 많아 배울 것도 많은 나는 늘 배우는 일에 목말라 있다. 누군가에게 글을 써보라고 권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힘든 일이 생기면 나의 밖에서 찾으려고 해 봐야 답이 안 나온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내면 깊은 곳의 나와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모든 것이 내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 소중한 시간은 글을 쓰면서 찾아오더라. 쓸수록 찾아오더라. 무리 지어 있는 곳에서 떨어져 나와 온전히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모든 건 내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거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살았고 살아가고 있음에 나를 껴안에 주고 싶게 된다. 힘들었던 일은 모두 흘려보내고 오늘, 지금 내 일만 생각하게 된다.


지난 일에 연연하기에 아이는 너무 빨리 커버 린다. 내 얼굴에 주름이 늘 듯 신랑의 얼굴에도 주름이 늘고 흰머리가 늘어간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는 시간은 내가 만들어가야 한다. 온전히 나를 만나는 그 시간에 오늘 내 앞에 주어진 모든 것들에 감사함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다시 힘을 얻는다. 조금 미뤄진 일을 할 에너지가 생긴다. 주어진 시간을 알뜰하게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파랗고 빨갛고 투명한 나를 온전히 만난 후 시작되는 조금 늦은 하루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


장욱진(1918∼1990)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 적어도 교만은 겸손보다는 덜 위험하며, 죄를 만들 수 있는 소지가 없기 때문에, 소탈은 쓸데없는 예의나 격식이 없어서 좋은 것이다.”
 (1974년에 쓴 글 '새벽의 세계' 중에서)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자신만의 아뜰리에를 가졌던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그렸던 화가. 심플한 것이 가장 최고라는 그의 인생철학에 걸맞은 삶을 살고 갔어요.

"나는 남의 눈치를 보면서 내 뜻과 같지 않게 사는 것은 질색이다. 나를 잃어버리고 남을 살아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점잖다는 것을 싫어한다. 겸손이란 것도 싫다. 그러는 뒤에는 무언가 감추어진 계산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솔직한 오만함이 훨씬 좋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편협하다거나 심하면 미친 사람으로 돌리기도 한다.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면 어떠랴, 그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편하다."

그가 쓴 글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인생을 선택해서 살든 그건 자신의 몫인 거죠. 저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를 추구합니다. 온전히 자신의 생을 살다 간 그가 참 부럽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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