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나의 1년

엘리자베스 너스

by 김상래
엘리자베스_널스.jpg 엘리자베스 너스/ 명상 Meditation / 1902

롱 패딩이 작아졌다는 생각은 작년에도 했다. 품은 그럭저럭 한 해를 나기에 괜찮아 보였는데 팔이 짧았다. 올해는 롱 패딩을 하나 사줘야지. 하고는 벌써 11월이다. 한 해가 다 가도록 아이에게 집중했던 시간을 나에게 몰입해서 썼던 모양이다. 그러는 사이 140을 입던 아이가 150을 건너뛰게 된 거다. 운동화 뒷굽의 바깥쪽이 닳아 있고 왼쪽 굽과 맞닿아 있던 곳은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렇게 될 동안 아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한 해에 두 번은 운동화를 사주고 옷가지들은 1년에 두 번은 해외구매대행을 했다. 코로나 때문이었을까? 구매대행하던 사이트가 없어졌다. 아이 꼬맹이 때부터 줄곧 1년에 두 번. 특히 블랙프라이데이가 있는 해엔 더 많은 옷을 구비해 뒀는데 사라져 버렸다.



“아이 옷 어디서 사요? 우리 애도 그 옷 사주고 싶은데 찾기 힘들더라고요.”

“아, 해외구매대행 사이트에서 사요. 거의 만 원 선이에요.”

“비싸 보이던데. 그 사이트 어디예요?”

“알려줄게요. 유한이는 싼 거 입혀요. 아이들 너무 금방 커서.”



나는 내 취향이 확고한 아이였다. 친구들이 하는 걸 따라 하는 게 그렇게나 싫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것이 있는 게 좋은 아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늘 어떤 유행이 몰아닥치기도 전에 내 유행을 먼저 만들어냈다. 그런 나에게 ‘논노’는 유행을 선도하기에 앞서 봐야 할 최고의 잡지였다. 교복 입고 다녔던 입장에서 멋 부릴 일이야 신발, 가방, 양말, 필기구, 필통 정도였을 텐데 나름 학교에서 최신 유행을 만들던 나였다. 유행에 대해선 명품을 두른 적은 없지만, 그거 어디서 산 거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별 미련이 없다. 보는 눈만 있으면 5천 원짜리 사파리(당근 마켓 이용)도 명품처럼 입고 다닐 수 있다.



아이 얘기를 하다가.

아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가늠이 되질 않아 집 앞 쇼핑센터에 갔다. 쇼핑센터를 가는 일은 굉장히 피곤하다. 저녁에 그곳엘 갔다는 건 그만큼 급한 일이었다. 비가 내리고 나면 금세 추워진다는 뉴스를 읽었다. 140을 입던 아이가 150을 입었는데 팔이 짧았다. 140을 입을 때는 아이의 갑바가 이렇게나 듬직해질 줄 예상하지 못했다. 어떤 브랜드의 옷은 155를 입어봤고 160을 입어 보기도 했다. 한 해를 보냈을 뿐인데 한 치수를 건너뛰는 일. 내가 정신없었던 1년 사이 아이는 폭풍 성장을 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책장 옆 벽에 아이 키를 재보느라 그어 두었던 줄이 10㎝가 넘게 위로 올라가 있었다. 41주 만에 태어난 유한이는 듬직해 보였다. 크면서 가리는 음식이 늘어 그런가? 아이는 자음 순으로 해도 앞자리, 키 순서로도 앞자리, 눈이 나빠 또 앞자리를 유지한다.



결국, 팔 길이 때문에 치수를 정하지 못하고 운동화를 신겨 보러 갔다. 신발도 역시나 마찬가지다. 브랜드별로 치수가 다 달라 직접 신겨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최대한 가볍고 신고 벗기 불편함이 없는 신발로 검정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또 검은색을 선택했다. 가장 무난하다는 이유. 왜 무난해야 할까. 신발이 튀어봐야 얼마나 튄다고 똑같은 신발을 신고 다녀야만 할까. 색이 똑같다고 다 같아 보이는 것도 사실 아닌데 너무 유난스러운 감정인가. 이유야 어쨌든 두 남자는 검은색에 표를 몰았다. 내가 졌으니 인정. 무난하다.



달랑달랑 신발 하나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둠이었다. 비가 그치고 나면 추워질 텐데 겨울옷을 어쩌지? 롱 패딩은 한겨울 옷이니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어 보기도 했다. 한철 입히고 나면 끝날 텐데. 지금보다 더 빨리 클 테고.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훨씬 많을 거야. 사치스러운 마음을 접는다. 어차피 아이는 그런 것에 아직 별 관심이 없다. 꼭 살 필요가 있겠냐고 입던 옷 입고 다니면 된다고 귀찮아하는 아이다. 그래. 저렴하게 겨울을 날 방법을 찾아보자. 당근 마켓을 뒤적거린다. 한해를 입히고 올라온 멀쩡한 롱 패딩이 많이 보인다. 하트를 꾹 눌러 두고 앱을 닫는다. 비가 한참이나 내리고 있지만, 아직 생각할 여유는 있으니까.



예멘에는 ‘가트’라는 것이 있는데 이건 담배도 아닌 것이 찻잎처럼 생긴 걸 질겅질겅 씹으면 어느샌가 마음이 편해지고 잠도 안 오고 식욕조차 없어지는 일종의 천연 엑스터시 같은 거라고 어느 책에선가 읽었다. 커피 석 잔을 마셨을 때의 효과라고. 그 예멘의 남자들은 담배는 안 해도 모두 ‘가트’를 질겅거린다고 한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종일 일해야 하는 고단한 남자들이 모두 씹어야 하는 가장의 무게 정도?

어제저녁 아이 운동화를 사주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엘 들렀다. 작은 맥주 다섯 캔과 라테 커피 하나를 골랐고 아이는 언제나 그렇듯 오랜 전통의 알로에 주스 하나를 마시고 싶어 했다. 속이 안 좋다는 신랑은 어쩐 일인지 주전부리에도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가 줌 수업을 하는 동안 어제 사 왔던 커피를 꺼내 마셨더니 ‘가트’가 생각났던 거다. 내게 커피 한잔은 그들의 ‘가트’ 정도의 위력과 비슷하지 않을까 해서. 어떤 이는 하루에도 몇 잔씩 마셔도 별일 없는 커피가 내게는 그들의 천연 엑스터시만큼의 효과를 준다. 정신이 또렷해지고 심박이 빨라져서 무언가 하지 않고는 안 되는. 맥주를 좋아하지만 많이 마시지는 못하고 와인도 좋아하지만 금세 취해버리고 위스키의 향이 좋아 얼음을 잔뜩 섞어 마셔도 곯아떨어지는 나는 커피도 그렇다. 예멘 모카 마타리는 아니지만, 편의점 커피도 나름 괜찮아, 들이키고 나면 빠릿빠릿해진다. 이따금 꼭 필요한 때에 사두고 마시곤 하는데 오늘 아침이 그랬다. 글 하나를 적어두고 써야 할 문서작업들이 있고 원고를 다듬어야 해서.



비 오는 월요일. 특별히 외출할 일이 없는 아이와 나. 무난한 검정 운동화는 얌전히 현관에 모셔져 있을 테고 정신과 손만 바쁠 내 몸도 얌전히 집안에 고이고이 모셔져 있을 날. 한여름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날도 한없이 좋은 나는 오늘은 꼼짝없이 집 안에 있기로 했다. 엄마의 무심함에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아이를 더 많이 안고 사랑해줄 날로 찜했다. 아이 수업 끝날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커피도 마셨으니 더 힘껏 사랑해줘야지. 유한아~




엘리자베스 너스 (Elizabeth Nourse / 1859~1938)

미국 여성 전업 화가


'일요일의 화가'일 수밖에 없었던

19세기 후반의 여성 전업화가

엘리자베스 너스의 그림을 가져와 봤어요.



1895년 프랑스 미술가 협회 준회원이 되고 1901년 정회원이 되었는데 미국 여류 화가로는 그녀가 처음이었다고 해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많이 달라져 보이진 않습니다. 결혼한 여성들은 아이를 키우거나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하면서 전전긍긍 살아가게 마련이니까요.



'명상'이라는 작품은 제 올해 1년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요.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은 분명히 늘었는데 아이가 훌쩍 커버렸다는 걸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거든요. 어찌 키울까 고민하며 아이를 보고 있는 일 말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뒹굴고 안아주고 놀아주는 일. 그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내가 행복하면 아이도 행복해하듯,

아이가 행복해하는 일에 조금 더 마음

을 기울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가 웃으면 저도 웃게 되니까요.



몸이 이렇게나 컸다는 걸 알게 되니 대견스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요.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조금 천천히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의 마음이었다가 나의 마음이었다가 그게 하나 일 수 없으니 턱을 괴는 일이 생기는 거겠죠.

이전 13화그래도 아빤 나의 소중한 아빠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