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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Jul 24. 2023

(67) 단통법 나비효과..."아! 팬택"

15부. 스마트폰 시장 재편

삼성전자와 애플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LTE 시장에서 2위를 수성한 곳은 다름아닌 벤처신화로 불린 팬택이다. 두 번의 워크아웃을 이겨내고 재활 의지를 다졌다. 대기업 틈바구니 속에서도 꿋꿋히 견뎌내며 단말 시장 경쟁을 활성화시킨 효자기도 하다. 경쟁은 곧 품질 향상과 가격 인하를 부르기에 팬택의 생사여부는 고객들에게는 득이 더 많은 선택지였다.


하지만 LTE 시장에서 발생한 과열경쟁은 체급이 낮은 팬택에게 시련을 안겨줬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점유율 확대에 나선 대기업과는 달리 팬택은 황새 따라 가랑이가 찢어지는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뱁새였다.


옥신각신하며 2위와 3위 사이를 오간 팬택은 또 한번의 재기를 노렸다. '메탈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물질입니다' 라는 카피를 통해서 흥행 기회를 찾은 팬택은 '베가 아이언'의 후속작을 기획했다. 다만, 그 타이밍이 썩 좋지 않았다. 출시 직전 이통3사가 역대 최장기간인 순차 영업정지에 돌입했다. 출시하고 싶어도 내놓을 수 없는, 팔고 싶어도 공급할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됐다.


더군다나 이통3사는 순차 영업정지 기간 동안 점유율 상승 또는 방어에 나서야 했기 때문에, 그에 준하는 스마트폰에 목을 멜 수밖에 없었는데, 그 제품이 스태디셀러인 '갤럭시S5'였다. LG전자의 경우 영업정지 직전과 이후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시장 압박에 나선 상태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팬택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물론, 엄밀히 말해 정부가 선택한 이통3사 순차 영업정지 때문에 팬택이 몰락했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그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팬택 박병엽 부회장 [사진=팬택]

 팬택, 초라한 시작…화려한 성장


직원 6명. 자본금 4천만원.


1991년 당시 창업주인 박병엽 부회장의 팬택 설립 당시 재원이다. 팬택은 1992년 4월 무선호출기 내수 및 수출 판매를 시작해 첫 제품군인 PP X01 시리즈로 성공의 신호탄을 쐈다. 시작은 작았을지 몰라도 성과는 대단했다. 그해 팬택이 세운 매출은 28억원.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스타트업이 이만큼의 매출을 기록했다는 점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선호출기 시장에서 가능성을 엿본 팬택은 1997년 CDMA 단말기 사업을 시작했다. 사세는 당연히 확대됐다. 같은해 CDMA 이동전화 단말기 생산을 시작한 후 6월 시티폰 CT-2 플러스를 출시했다. 1998년에는 당대 1위인 모토로라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했다. 같은해 'IM-700'을 개발해 세상에 내놨다.


2001년은 팬택의 전환기가 마련된 시기다. 팬택은 자신보다 더 규모가 큰 현대큐리텔 인수에 성공했다. 다윗이 골리앗을 집어 삼킨 셈이다. CDMA에 이어 GSM 단말기 사업을 본격화했다. 2005년에는 SK텔레콤이 운영했던 SK텔레텍까지 인수한다. 내수 시장에서 성공기록을 세운 팬택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고통없는 성장은 없었다. 팬택이 너무 빠르게 해외진출을 서두른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됐다. 그에 따라 팬택은 첫번째 시련을 맞이했다. 휴대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에 이은 2위 사업자이기는 했으나 2007년 첫번째 워크아웃을 경험했다.


물론 팬택은 이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2011년 12월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무엇보다 그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팬택은 휴대폰 2위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일본 시장에 판매된 팬택 시리우스 알파 [사진=팬택]

팬택의 원동력은 다름 아닌 그치지 않는 혁신에 있었다. 덩치는 작았지만 재주가 많았다. 또한 그 자신감을 통해 워크아웃 당시에도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2010년 5월 첫 스마트폰 '시리우스'를 SK텔레콤을 통해 출시했는데, 이 제품은 89만9천800원이나 할 정도로 고가 하이엔드 모델이었다. 통상적으로 후발주자 또는 규모가 작은 기업의 경우 틈새 또는 엔트리 시장에서 점유율 상승을 노렸겠지만 팬택은 늘 정면승부를 택했다.


'시리우스'는 다양한 폼팩터로 출시됐다. 당시 스마트폰의 유통의 주체는 이통사였고, 그러다보니 제조사에서 나온 모델은 특정 이통사에 단독 출시되거나 타 이통사에서는 그에 맞게 커스텀돼 다른 이름으로 판매되는게 보통이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 '갤럭시S'는 SK텔레콤을 통해 출시됐지만 KT에서는 '갤럭시K', LG유플러스에서는 '갤럭시 U'로 출시됐다. 성능은 원조 모델의 정통성을 부여한 듯, 이후 출시되는 변종 모델일수록 떨어졌다.


팬택 '시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시리우스는 KT에서는 '이자르'라는 이름으로 LG유플러스에서는 '미라크'라는 이름으로 변경됐다. 그나마, 예외적으로 '미라크'는 SK텔레콤에도 도입된 바 있다.

배우 차승원이 광고모델로 나선 팬택 베가 [사진=팬택]

시리우스가 등장한 2010년은 '스카이'에 이은 팬택의 스마트폰 브랜드 '베가'가 탄생한 해이다. 2010년 7월 30일 SK텔레콤을 통해 '베가'가 세상에 나온다. '베가'는 초기 제품명에 불과했으나 이후 브랜드로 승격된다. 광고 모델로 배우 차승원을 기용했다. 가격은 92만7천300원으로 삼성전자와 LG전자 하이엔드 폰에 정면대결을 펼쳤다. SK텔레콤을 통해 출시된 '베가'는 KT와 LG유플러스에 맞춰 '베가 Xpress'라는 이름으로 보급된다.


팬택은 '베가'를 프리미엄 브랜드로 승격시키면서 이통사별로 달리 출시했던 '이자르'는 여성특화, '미라크'는 보급형 라인업으로 각각 브랜드화했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브랜드는 차후 '베가'로 흡수 통합된다.



팬택은 2011년 3월 29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팬택 사옥에서 조촐한 창립 2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박병엽 팬택 부회장은 “첨단 기술 제조업으로 90년대 창업하여 20년을 생존하며 매출 3조원을 기록한 유일무이한 대기업의 구성원으로써 긍지를 가져 달라”고 당부하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기술로 승부, 2015년 매출 10조원 달성을 통해 50년 이상 영속할 수 있는 강한 기업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강조했다.


팬택에는 '회장'이 없다. '부회장'만 있다. 사실상 박병엽 부회장이 오너이기는 하나 스스로 회장에 오르기 보다는 부회장 자리가 자신에게 맞는 지위라 생각했다는 후문이다. 사석에서도 격의 없이 여러 사람들과 어울릴 정도로 호탕한 인품을 가진 인사였다.


창립 20주년을 맞은 팬택은 누적 매출액 21조 5천억원, 누적 수출액 104억 달러, 최근 10년간 연구개발(R&D) 투자 금액도 약2조원에 이를 정도로 기술제조기업이면서 수출기업으로 성장했다. 창업 11년 만에 누적 10억 달러 수출 기록을 달성한 후 20년만에 누적 104억 달러를 수출했다. 창립 10년 후인 2001년 임직원 2천여명, 매출 1조원대에 진입하고 2005년까지 56%에 이르는 연평균복합성장율(CAGR) 기록하기도 했다.  


품질 면에서는 미국 대표 사업자인 AT&T의 거래업체 평가에서 연속 3회 1위를 달성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모토로라, 림(RIM), HTC, 삼성전자, LG전자 등 AT&T에 납품하는 국내외 10여 개 업체를 제치고 종합 평가 1위에 선정됐다는게 자부심의 근거다.


2011년에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구축한 2위 위치를 굳건하게 지키며 스마트폰은 물론 태블릿 PC 등 다양한 모바일 기기를 공급하는 IMD(Intelligent Mobile Device) 강자로 도약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팬택은 내수시장에서 2011년 1분기 동안 60만대 이상의 스마트폰을 판매하며 누적판매량 160만대를 기록하고 있고, 일본에는 KDDI 최초로 안드로이드 2.2버전의 스마트폰을 출시하기도 했다. 또 미국에는 맞춤형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으로 진출한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2015년 매출 10조원의 고부가가치 회사로 성장해 50년 이상 영속할 수 있는 강한 기업을 만들겠다는 포부였다.


박병엽 부회장은 창립기념사에서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회사, 최고의 가치를 인정 받는 회사, 국가와 사회와 인류로부터 존경 받는 회사로 거듭나기 위한 팬택호의 주인공은 구성원 여러분이다”고 격려하고 “최고경영자인 저부터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더 도전하고 더 치열하고 더 매진하겠다”고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배우 이병헌이 팬택 베가 레이서 광고모델로 참여했다 [사진=팬택]

"페라리가 경품이라고?", 베가레이서 질주


팬택은 2011년 6월 10일 이통사마다 달리 전략군을 운영하던 LG전자와는 달리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동일 대표 플래그십 모델을 이통3사에 동시 공급했다. 그 첫번째 모델이 '베가 레이서'다.


당시 국내 최초 듀얼코어 스마트폰이라는 마케팅 전략 포인트와 '레이서'에 집중해 다양한 프로모션을 전개했다. 배우 이병헌을 광고모델로 기용했다. 여담으로 이병헌은 마지막까지 팬택과 의리를 지킨 모델로 남았다. 콘서트를 열고 경품으로 스포츠카인 페라리를 걸었다. 공격적인 마케팅 투자에 결실도 확실했다.


'베가레이서'는 누적판매량 180만대를 달성할 정도로 팬택 내부에서 기록적인 판매량을 보여줬다. 이같은 성공은 팬택 박병엽 부회장의 결단과 직원들의 포기를 모르는 열정의 결정체였다. 이와 함께 팬택은 드디어 워크아웃을 졸업한다.


박병엽 부회장의 성공일화는 여러 곳에서 회자됐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삼성전자가 갤럭시S2를 1.2GHz 클럭속도의 듀얼코어 프로세서를 장착한데 자극 받은 박 부회장은 퀄컴을 찾았다. AP 성능 향상을 꾸준히 요구하고 나선 것. 퀄컴은 그런 박 부회장을 돌려 세웠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박 부회장에 퀄컴도 손을 들었다. 박 부회장뿐만 아니라 주요 임원들도 미국 샌디에이고에 위치한 퀄컴 본사를 끊임없이 들락날락했다.

팬택 베가 LTE [사진=팬택]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가 2011년 7월 1일 나란히 4세대통신(4G) 롱텀에볼루션(LTE)를 상용화했다. 팬택도 LTE 스마트폰 마련에 분주했다. LG전자보다 근소한 차이로 '베가 LTE'를 SK텔레톰을 통해 먼저 내놨다. 이 때 팬택은 또 다른 차별화를 위해 사용자인터페이스 브랜드로 '플럭스(FLUX)'를 전면에 내세웠다. UX 자체를 브랜드화해 알릴 정도로 자신감이 있었던 시기다.


이 후 SK텔레콤과 KT에는 공용모델인 '베가 LTE M'을, LG유플러스에는 '베가 LTE EX'를 출시했다.

팬택은 가요계의 인기스타 보아를 ‘베가레이서2’의 모델로 발탁했다 [사진=팬택]

LTE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팬택은 기세를 몰아 2012년 5월 11일 이통3사를 통해 대표 모델은 2세대 '베가 레이서2'를 내놓는다. 퀄컴의 LTE 원칩을 탑재했다. 팬택이 20분기 연속 흑자 행진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팬택은 당시 LG전자와 2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마케팅 적으로는 LG전자를 언급하기 보다는 1위 업체인 삼성전자를 물고 늘어졌다. 팬택은 '베가레이서2'에 대해 LG전자 옵티머스 LTE2보다 품질면에서 월등함을 강조했다. 삼성전자 '갤럭시S3'와 정면대결해도 손색이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전세계 시장에서 노키아를 제치고 휴대폰 왕좌에 올랐을 때다.

팬택 베가 R3 [사진=팬택]

이러한 단면을 보여주는 모델이 '베가 R3'다. 팬택은 베가레이서2가 출시된 해인 2012년 하반기 전략 스마트폰 '베가 R3' 론칭 무대로 삼성전자의 앞마당인 서울 강남 'M스테이지'를 꼽았다. 서울 상암동 본사에서 신제품을 공개했던 전례를 미뤄봤을 때 이례적 행보였다. 마치 애플 텃밭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삼성전자가 신규 갤럭시를 선보인 것과 마찬가지다.


'베가 R3'은 당시 한손 사용성을 중시하는 사용자들에게 맞게 UI를 재편하고 고질적인 전력소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슈퍼 배터리팩'을 도입했다. 대용량 배터리와 초고속 충전기술, 2포트 어댑터를 선보였다. 전력 소모는 낮추면서 충전 속도를 높였다. 베가 R3는 출시 4개월만에 국내 80만대 판매량을 달성했다.


팬택 백아연 시그니처 서비스 체험 [사진=팬택]

완벽했던 '베가 아이언'…불행은 행복할때 찾아왔다


불행의 시작은 가장 행복할 때 찾아온다.


2013년 팬택의 최고 제품으로 손꼽히는 '베가 아이언'이 출시됐다. 당시 팬택은 늘어난 부채비율과 줄어드는 판매량, 급락한 영업이익 등이 서서히 겹치면서 어려움이 가중된 상태였다.


이와는 달리 '베가 아이언'은 소비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제 역할을 했다. 일체형 메탈 테두리를 도입한 베가 아이언은 수신감도를 떨어뜨린다는 단점과 비용 상승문제, 어려운 가공 방식이라는 허들을 뛰어 넘은 결과물이었다.


당시 이준우 팬택 기술전략본부장(부사장)은 2년 이상 가치를 지속할 수 있는 제품, 획일화된 디자인 속에서 차별화된 디자인, 사용할 수록 가치가 돋보이는 소재를 사용하자는 일념하에 200여 명의 연구인력을 투입, 6개월 간 선행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중간에 품질을 더 높이기 위해 5개월의 추가 개발기간과 200억원의 추가 개발 비용도 투입됐다.


이 과정에서 5번의 설계 변경, 10번의 디자인 변경이 이뤄졌다. 출시 4개월 전까지만해도 출시 여부조차 불분명했다. 문제해결을 위해 3천 시간의 연구 개발 기간과 3만번의 통화 테스트, 2만번의 품질 테스트, 생산공정 변경까지 단행하며 마침내 '베가 아이언'을 완성해냈다. 베가 아이언의 별명으로 인해 모델로 가수 '백아연'이 나서기도 했다.

팬택 베가 아이언 [사진=팬택]

혁신적 제품을 내놓긴 했지만 팬택은 해를 넘긴 2014년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통3사가 불법 보조금으로 영업정지에 빠지면서 4월 출시 예정이었던 전략 스마트폰 '베가 아이언2' 출시를 뒤로 미뤄야 했다. 그 사이 팬택은 또 다시 워크아웃을 맞이했다.

팬택 베가 아이언2 [사진=팬택]

물론 팬택은 워크아웃 탈출을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지문인식 기능을 도입한 '베가 LTE-A', 스타일러스 펜을 내장한 '베가 시크릿노트', 사운드 특화 뮤직 스마트폰인 '베가 시크릿업'을 차례로 선보였다. 팬택만의 아이덴티티가 녹아든 신제품이었다.


팬택은 2014년 8월 19일 법정관리가 시작되면서 회생절차를 밟았다. 팬택은 기존 사용자들을 위해 서비스센터를 정상 운영했다.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도 꾸준하게 진행했다. 내외부적으로 팬택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현실은 냉혹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팬택은 마지막 '스완송'을 부른다. '베가 팝업 노트'를 어렵게 출시했다. 신제품은 고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계속해서 찍어낼 여력이 많지 않았다. 원하던 원치않던 그렇게 점점 고객들에게 멀어졌다.

팬택 아임백 [사진=팬택]

결국 팬택의 주인은 바뀌었다. 2015년 11월 26일 팬택은 법정관리 15개월만에 기업회생절차를 마치고 같은해 12월 1일 신설법인 팬택이 공식 출범했다. '아임백'을 출시하면서 잠시 부활을 꿈꾸기도 했으나 많은 염원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추억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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