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쁨보단 존재감이다

by Aarushi

겨울이라서일까. 부쩍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게 되고 날 절로 미소짓게 한다. 어떤 향기, 어떤 노래, 어떤 장소, 어떤 말들...이 내게 훅 들어올 때 혹은 스쳐지나갈 때 지나간 사랑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다. 그땐 그랬지.하며 있는 그대로 그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 지나온 나의 사랑이든, 삶이든 모든 것에 초연해지고 감사하고 사랑하게 된다.


정확히는 서른 초반부터인 것 같다. 옷을 사는데, 외적인 면을 꾸미는데 크게 의미를 두지 않게 된 것이. 광화문 직장인 시절엔 나름 커리어 우먼 스타일의 흰 셔츠나 블라우스 하이 웨스트나 미들 스커트에 미들힐을 매일 같이 신고 다녔던 때도 있다. 퇴사하면서는 하는 일이 달라져서도 있겠지만 확실히 지금의 나는 옷이 자유롭고 편안해졌다.


웬만해선 옷을 잘 사지 않는 지금이지만 옷을 사야할 땐 시즌이 지났어도 아무렴 상관없는, 내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스타일을 산다. 시즌오프 가격이면 몇 십만원짜리도 몇 만원이 되는데 그런 옷을 사서 잘 입는 성미가 있다. 롱스커트를 잘 입는 편이라 특히나 밑단에 레이스가 달린 스커트를 즐겨 입는데, 어쩌다가라도 내 눈에 딱 들어오는 내 마음에 쏙 드는 롱스커트를 발견할 때면, 게다가 가격도 어쩜.이러는 옷을 볼때면 기분좋게 산다. 그런 알뜰함과 살뜰함이 날 기분좋게 한다.


이국적이다, 외국에서 사는 사람인 줄 알았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것 중 하나는 내 스타일이 아닐까 싶다. 피부도 본래 까무잡잡한데다 염색도 웜브라운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이나 분위기, 옷 스타일이 그러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보헤미안 스타일 감성도 좋아하는데 핏되는 것보단 루즈한 감성을 선호한다. 패브릭을 좋아하는 것도 있다.


곧 마흔을 앞두고 드는 생각은 실은 거창할 거 없다. 마흔이라고 뭐 별거람.싶은 것도 있고 들뜸이나 어떤 격정적인 감정의 동요도 아니고 그것은 외려 차분하면서도 고요하고 침착한 것이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직관적인 앎도 있고 나도 모르게 절로 내 안에서 나오는 직관의 소리, 수용의 마음... 그렇게 나도 나이 들어가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지나온 사랑들을 생각하자면, 한 때 열렬히 사랑했던 누군가를 떠올릴 때면, 서로의 영혼을 성장하게 하기 위함이었구나. 그러기 위해 우린 만났구나. 사랑을 했구나...하는 것이 있다. 나의 지나온 모든 사랑은 실은 모두 고도화된 자연의 계획이 아니었을지. 자연의 선물이 아니었을지. 사랑을 통해 나는 성장했고 성숙할 수 있었고 내게 다가갈 수 있었다. 질문할 수 있었다. 나이 들어감으로써 나이 들지 않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인 영적인 성장이 아닐까.


내 안과 마주하는 독대는, 대화는 언제나 내게 이롭다. 사람들을 볼 때 이젠 눈에 들어오는 건 얼굴의 기운과 눈, 눈빛이다. 절로 그렇게 되는데 기운이 맑은 사람은, 눈빛이 아름다운 사람은 분명 내면도 맑은 사람일거란 생각이 있다. 자신과의 치열한 혹은 지리멸렬한 대화를 해본 사람이라면야 밀푀유처럼 켭켭이 쌓여 형성된 그 자신만의 분위기, 아우라가 있다. 그 내면의 성장과 고독이 외면으로 확장돼 드러나는 시기가 마흔 언저리인 거 같다. 마흔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심상이 중요한 이유는 내면의 상이 외면이기 때문이다.


이십대, 서른 초반만 하더라도 어딜 가도 예쁘다. 아름답다. 매력있다. 이국적이다.라는 말을 들어왔다.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쩌면 난 정말 매력적인 사람일지도 몰라. 난 매력적인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했다. 흔히 생각하는 요목조목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한국적인 미인은 아니지만 나는 나만의 분위기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젠 그런 예쁨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동시에 생기도 이삼십대 젊은이들과는 확실히 달라지게 되는 나이가 됐다. 생기와 예쁨은 그들보다 없을 수 있어도 세월이란 것과 함께 쌓아온 나만의 분위기, 섹시함은 따라올 수 없다는 생각이 있다. 내가 신경써야 할 것은 친절하고 무해하게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것, 무해한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파리 살 때, 팔레 루아얄 이자벨 마헝 패션쇼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던 현지 친구 제시카 덕분에 그녀의 패션쇼에 초대받았던 적이 있다. 올 어쎄스 팔찌를 차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친구의 동료 프랑수아의 안내를 받아 쇼 시작전부터 곳곳을 구경할 수 있다. 백스테이지 안에 들어갔는데 저 멀리서 이자벨 마헝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자벨 마헝 옷이라곤 입어 본 적 없고 오직 아는 건 이름 뿐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언제 이렇게 백스테이지에서 이야기를 나눠보겠는가.싶어 백스테이지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우리 혹시 서울에서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대화하는 내내 상냥하고 친절했던 그녀는 백스테이지 안 그 어떤 모델들보다도 아름다워보였다. 맨 얼굴에 염색하지 않은 그레이 헤어, 자신의 옷과 백, 신발로 자기를 드러내는 그 모습이 내겐 인상적이었다.


자기 만의 분위기, 아름다움은 밖에 있지 않다. 내 안에 있다. 백스테이지 안 지지 하디드보다 이자벨 마헝만 이 내 눈에 들어왔다는 건 그녀 자신, 그녀만의 분위기 아우라 때문이었던 것처럼, 요즘 사람들을 볼 때 예쁨보단 분위기와 아우라에 매료된다. 예쁜 사람보단 분위기와 아우라로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사람이 내겐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분위기와 아우라란 존재감과도 같은데, 결국 기운이겠다. 예쁨보단 존재감이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빛나게 한다는 걸 알게 된 나이가 됐다. 나이 들어가며 좋은 점이 참 많구나.새삼 알게 되는 요즘이다. 확실히 생기는 이전만 못하고 눈가의 주름도 보이고 목과 손등의 주름도 확연히 느껴지는 나이가 됐지만 외적인 변화가 아쉬울 새 없이, 황홀감과 안정을 주는 내적 성장과 직관적인 앎과 삶의 지혜와 통찰이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젊음이요, 그러니 아쉬워하기보단 지금을 사는 것, 타는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입어도 아름다워보이는 고급스러워보이는 마법이 있다.


그러려면 내적 대화와 내적 성장, 내면의 확장이 필요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겨울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