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짧다

by Aarushi

넥 주위 라인에 복슬복슬 털달린 롱 가디건이 있다. 참 따뜻해서 자주 입는 옷인데 오늘 아침 그 가디건을 입다, "그러고보니 이젠 옷 스타일이 비슷비슷하네, 색도 아이보리, 베이지, 브라운, 인디고 블루, 인디 핑크 이런 류고... 맨날 같은 옷만 입네...^^"했다. 나이 들어가서일까. 내 삶의 태도의 변화일까. 무튼 지금의 나는 몇 벌을 잘 조합해 번갈아 가며 잘 입는다. 똑같은 옷을 입어도 아무렴 뭐 어떤가. 내 만족이고 내 살뜰함이고 내가 괜찮으면 되었다는 생각이 있다. 오늘 아침 음악 선곡은 Christmas Jazz. 집에 있어도 아늑한 카페에 와 있는 듯한 안정감을 준다.


날이 좀 덜 추운듯해서 브라운 가디건만 걸쳤다. 가디건보단 좀 옅은 카멜색 크로스백을 야물게 메고 집을 나섰다. 차에 달아둔 키링 하나를 빼서 가방에 달았다. 한 손엔 말차를 담은 텀블러를 들었다. 오직 나만이 갖고 있는 작고 사소한 루틴 하나, 습관들이 날 외려 자유롭게하고 즐겁게 한다.


갈수록 겨울이 가장 좋아지는 건 왜일까. 겨울의 차가움이 이젠 쌀쌀맞게 느껴지지 않아서겠지. 외려 그 차가움이 날 더 단단하게 만들었단 걸 알아서겠지. 추운 겨울의 스산함과 쓸쓸함과 적막과 고독이 나와 꼭 닮아서겠지.싶다.


인생 짧다... 부쩍 아니 절로 되뇌이게 되는 문장인데, 진짜 그러하다. 인생 진짜 짧다. 그런 것이었다. 서른무렵부터 부쩍 힘든 시기를 지나와서일까. 이십대의 시절도, 삶도 분명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보니 지금은 그 시절이 참 그립고 아득하고 아련하고 아름답고 무척이나 낭만있게 느껴진다. "그때 참 좋았지. 좋았구나. 좋았어..."하게 된다. 자기 생에서 누구나 화려했던 시절도 있었겠고 본인이 생각했을 때 가장 찬란했다 혹은 아름다웠다 호시절이었다 생각하는 시절도 있겠고 참 힘들었어.하는 시절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나보니 그 모든 것은 실은 다른 게 아니었다. 모두 같은 선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막상 마흔이 된다 생각하니 우울감이 밀려온다기보단, 생각이 많아진다기보단 나의 경우 외려 말이 없어진달까. 생각이 없어진달까. 인생은 내 계획대로 내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아서기도 하고 파노라마처럼 지난 삶을 돌아보니 삶이란 그저 펼쳐지는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에서다. 굉장히 사색적이게 되고 관조적이게 된달까. 알아차림이 용이해지고 나를 제3자처럼 바라보게 되는게 익숙해진달까.


조금 전 침대로 향하는 길에 순간 쓱하고 미끄러졌다. 찰나에 일어난 일인데 악!소리를 내고 무릎을 펴니 분명 멍이 들겠구나.할 정도였다. 발가락도 함께 접혀 일시적 고통이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참 그러보면 지금까지 어디 하나 아프지 않고 심지어 무릎 수술같은 거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싶고 이젠 몸이 한군데씩 아파와도 이상할 거 없을 나이가 된건가.하는 쓸쓸함도 조금 있었다. 마흔을 앞두고 나는 외려 많은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지나온 나의 삶, 가족, 사랑, 인연들에 대해 많은 부분이 이해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건가.싶다가도 나는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른다.가 된다. 인생 짧다.는 말, 무척이나 끌리셰하지만 이만한 말도 없다.


외적을 가꾸는 일에서는 치장을 위한 소비보단 내 몸을 관리하는 편이 더 이롭다는 생각을 하는데 진짜 필요한 것이 아니면 웬만해선 잘 사지 않는 편이다. 나이 들어가며 부쩍 사고 싶은 욕망이 줄어든달까. 몇 천원 몇 만원짜리여도 내 취향의 것이면 충분히 만족하는데 익숙하다. 그런 소비적 패턴도 차츰 변하는 것 같다. 순간순간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가 변함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하는 구나.싶다.


낭만이 많이 사라진 시대다. 80년대 후반생으로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는 시대를 거쳐왔고 아날로그와 디지로그를 모두 경험한 세대다. 90년대 2000년대 감성이나 물건에 대한 향수가 있다. 옛것에 대한 애정이 있다. 낭만이 사라지는 건 아무래도 아쉽다. 내가 어릴 적만해도 동네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저녁이 되면 저 멀리 엄마가 부엌 창문 너머 저녁먹자고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정겨움과 정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살림살이는 그때보단 나아졌지만 우리에게, 인간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의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구절처럼, 급변하는, 휘황찬란한, 어느 땐 정말이지 각박하고 삭막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욕심이 줄었달까? 나로 만족하게 됐달까? 오롯이 내 안에 집중하며 나 자신이 만족하면 됐다는 걸 알아가고 배워가고 있고 그 내려놓음과 집착없음이 나의 중년을 조금은 편안하게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있다. 인생 짧다. 마흔이 되니 시작보단 정리를 하게 되고 그 정리란 포기나 게으름이 아닌 내적 성장과 내면의 채움과 사랑의 확장 이런 것이 된다. 안정적인 삶이란 게 본래 있었나? 이젠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하는 자책이나 아쉬움이나 후회보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참 행복한 사람이야. 지나온 나의 삶이 외려 무척이나 감사하고 사랑스럽고 연민하게 된다.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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