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가 정말이지 엊그제 같은데 눈깜짝할새 오늘이다. 작년 이맘때쯤 그리고 1월엔 제주에 있었다. 올레 7코스 초입 자락에 나만의 힐링장소가 있는데, 작은 해안도로가 있다. 간혹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이거나 드나드는 차들은 드문 곳인데 내 눈앞에 펼친 바다 자체를 만끽하기 좋은, 사색하기 좋은 곳이다. 저녁 6시쯤 되었을까. 그 겨울 바다는 내게 많은 걸 알려주었다. 자연은 말이 없지만, 바다는 말이 없지만 꼭 말하지 않아도 알겠는, 알게되는 것, 일러주는 것이 있다. 핑크빛 하늘은 날 꽉 껴안아주는 듯했고 출렁이는 바다는 나를 응원하는 듯했고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은 내 뺨에 앉아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20분여 눈을 감은채 그렇게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그 기운으로 한 해를 살았다. 12월의 마지막 날이어도 여느 날과 같다지만 그래도 무언가 다짐하고 계획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를 비롯한 세상이 모두 아름답고 감사하고 경이로워보이는 마법. 사는 힘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영화를 봤는데 다시 봐도 무척이나 여운이 깊다. 생과 사. 실은 하나라는 걸 우리는 잊고 사는 게 아닌가. 나의 모든 괴로움과 우울과 불안도 실은 이걸 망각하기 때문이겠지.싶다. 우연히 스치듯 지나간 영상에서 본 어느 인터뷰어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You never know what someone's going through." 끌리셰한듯하지만 유독 이 말이 가슴 깊이 와닿을 때가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너무도 눈부시고 아름답고 때론 극적이어서 서로가 서로를 더욱 안아주고 사랑해야하고 친절해야 한다는 알아차림이 인다.
한 해를 살포시 돌아본다. 내가 했던 걱정이나 불안들은 실현되지 않았고 가까스로 때로는 평온하게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다는 것과 두려워하지 말라는 내 안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서로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구나. 시간이 이토록 찰나인데 나는 무엇에 집착하는가?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가? 왜인가? 계속 물어보는 과정과 작업 속에 내면의 힘이 자란다.
아침에 나오면서 문득 내 목의 주름이 보였다. 주름이 가늘게 보이는데 나 정말 이제 나이 들어구나.싶고 아주 자연스레 수용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젊음은 공평한 것 아니겠는가. 나 또한 그런 시절이 있었고 이제는 봄 여름을 지나 가을 겨울로 접어드는 것이겠지. 자연의 이치는 이토록 정교하구나.싶다.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커피 한 잔 밖에서 마시고 오자 싶었다. 그러다 글이 쓰고 싶어졌고 노트북을 켰다. 글쓰기 하나면 외롭지 않다. 지루하지 않다. 꽉 찬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오늘 아침 메이크업을 하다 거울 속 내 눈을 바라보다,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눈동자 색은 marron, 밤색인데 쌍커풀이 있는 눈에, 속눈썹이 긴 편이라 어쩌면 내 눈이 날 이국적인 외모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눈이 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내 얼굴을 보면 눈이 가장 먼저 보인다고 한다. 나이 들어갈수록 눈의 눈빛의 맑음과 빛만은 잃지 않으려 하는데 그러려면 내면의 독백과 지성이 필요하다. 얼마 전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내게 말했다. "선생님은 눈이 정말 예뻐요. 회색 고양이의 눈동자가 햇살에 비친 눈 같아요." 나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는데 어린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나의 눈에 대한 묘사에, 이보다 더 한 칭찬이 있을까.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내면이 외면으로 잘 확장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눈으로 드러나고 있는 걸까? 나름 잘 가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안도감도 있었다.
문득 귀한 분위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마흔이 되니 나이 들어가니 내가 신경써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구나. 귀한 분위기는 화려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좋은 옷을 입는다고 해서 좋은 가방을 든다고 해서 좋은 신발을 신는다고 해서 좋은 차를 탄다고 해서 좋은 아파트에 산다고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부쩍 죽음을 더욱 상기한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인식하며 사는 삶이 내 안의 두려움과 걱정 불안을 순식간에 사그라들게 한다.
2025년 12월 마지막 날의 오후 카페 안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러면서도 한산하고 다정한 분위기가 있다. 그 가운데서 글쓰고 있는 나는 사람들과 세상이 이토록 다정해보인다. 좀 전엔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통화를 했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게 되는, 그렇게 전화를 끊고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아빠는 오늘 저녁을 사주신다고 했다. 아빠댁 근처 카페에 미리 와 글도 쓰고 사색도 하고 한 해를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진짜 마흔, 중년이 된 나는 귀한 분위기에 관심이 있다. 좋은 기운을 가진 사람, 사랑이 가득한 사람, 친절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 귀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 내면이 단단한 사람, 차분하고 침착한 사람, 건강한 사람, 이런 것들이 나의 다가오는 마흔을 물들일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라! 늘 새기는 말인데 나는 마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짜 나를 그리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