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쏟아지면 정말이지 이런 소녀일수가 없다. 누구나 그렇게 된다. 눈송이 한 알 한 알이 선물같다. 하얗게 쌓인 눈은 이토록 내 마음을 정화하고 내 눈을 맑게 한다. 눈이 오니 이토록 신이 날수가 없다. 눈 앞에선 나이도 그 어떤 경계가 없다. 어린 아이와 내가 다를게 무엇인가. 그 순수. 나이들어서도 잃고 싶지 않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된다.
제주행 비행기를 끊었다. 이번 설엔 혼자가 아니라 엄마와 함께 보내기 위해선데, 지난 몇 년간 명절에 그 어느데도 가지 않았다. 정말이지 혼자 보내기를 택했다. 그땐 그러고 싶었다. 혼자 집에서 쉬는 일, 혼자 지내는 연습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지내다보니, 명절이든, 연휴든, 크리스마스든, 생일이든 내겐 여느 날과 다름 없는 보통의 하루가 되었다. 알게 되었다는 게 맞다. 그 어느 날도 특별할 거 없는 보통의 날이란 걸, 다시 말하면 그래서 어느 한 날도 특별하지 않은 날이 없다는 걸.
싱잉볼 음악을 옅게 틀어놓곤 잠시 머무르고 있다. 앉아서 정지한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숨만 쉬고 있는. 들숨과 날숨을 명료하게 알아차리면서 그저 고요하게 머무는 상태ㅡ 연습.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이지 기적이구나! 행운이구나! 선물이구나!를 알게 된다. 우리 모두는 소중한 being이라는 것. 그러므로 친절해야 한다로 이어진다.
'나'란 무엇인가? 닿을듯 말듯 그러나 직관적인 앎으로 확장해나가는 질문이다. 질문하다보면 어느 순간 물리가 트일 때가 있다. 이 또한 그렇군! 이거야! 혹은 깨달았다.가 아니라 그 순간엔 침묵과 끄덕임만 있다. 깨달았다.는 말을 경계하는데, 깨달았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것과 그보단 그 어떤 것에도 갇혀 있지 않은 인식의 확장, 내면의 확장이 내겐 중요하다.
난 알아요.가 아니라 just yes. 혹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가 직관적인 앎에 가깝게 한다. 실은 심적으로 막막한 요즘, 내가 나를 바꾸는 게 가능할까? 정말 바꿀 수 있을까? 바뀌고 싶은 것이 이보다 강렬했던 적이 없었을 만큼. 변화를 원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이따금씩 거세게 불어닥치는 불안과 두려움, 우울이란 실체 없는 것에 대하여, 감정에 대하여 이제 더는 흔들리고 싶지 않다는 것과 나 자신을 파괴하는, 좀 먹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편안하고 싶은 것. 평온하고 싶은 것. 고요에 머무르고 싶은 것...
'나'ㅡ는 무엇일까?
이전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누구"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의 질문을 Who 에서 What(무엇)이 됐다.
산만한 정신을, 주의를 여기.에 집중하는데 글쓰기만한 게 없다. 글쓰기 할 때, 독서할 때, 이토록 여기 일수가 없다. 후루룩 쉼없이 써내려가는 걸 보면, 뇌.가 참 궁금하면서도 의식도 참 신비스럽다.
문득 취향이란 단어가 스친다. 취향이 있다는 건 나를 알아간다는 점에선 흥미롭지만 요즘엔 취향이 꼭 있어야하나? 취향이 없어도 괜찮다.로 이어진다. 꼭 취향이 있어야지만이 매력적이라거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거라 생각지 않는다. 취향도 있음과 없음의 구분이 아닌 전체로 봐진다. 취향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중첩인 상태다.
보통의 하루에서, 내가 좋아하는 커피컵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행위와 내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 따뜻한 바닥에 소파를 등에 기대 앉아 글쓰는 일, 들숨과 날숨 아래 조용히 숨죽이며 책장을 넘기는 일,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일, 수첩에 이것저것 적어내려가는 일, 딸기 10송이를 씻어 예쁜 접시에 담아 포크로 콕 찍어 먹는 일,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송이를 온 몸으로 맞아 자연과 하나되는 순간들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이야기가 없으면 나는 없다. 의식도 없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밝게 즐겁게 바꿔나가야 한다. 자꾸 많은 것에 초연해지는 것 같아 이래도 되나.싶지만 자꾸만 그리 되는 걸 어뜩하나.싶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인간관계의 축소도 마찬가지다. 이러다 진짜 고립되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축소지향적으로 살고 있지만, 사는데엔 정말이지 지장 없단 걸 잘 알고 있는 덕분에. 그게 편안한 걸 어뜩하나.그러곤 미소짓고 만다.
불편한 사람과 억지로 마주해야 하거나 관계를 억지로 노력하는 일이 이젠 싫증이 났달까. 과도하게 피로하달까. 에너지를 그곳에 집중할 여력이 없는 것도 있다. 그보단 나를 먼저 돌보고 내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이해하고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이 내가 사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이롭다.
며칠 전 영드 피키 블라인더스를 봤다. 킬리언 머피의 팬인데,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의 눈빛.
그의 눈빛은 사람을 끌어들인다.
그의 눈은 spiritual함이 느껴진다.
그의 눈빛에서 순수함, 카리스마, 섹시함, 맑음이 뿜어져 나오는 건
그가 내적으로도 분명 의식이 확장된 사람일거란 생각이 든다.
섹시함은 눈빛에서 나온다.
나이들어갈수록 이십대 삼십대 초반같은 생기발랄함은 줄어든다. 나이에 맞게 내가 어필할 수 있는 혹은 매력적일 수 있는 요소들은 분명 달라진다. 더 젊어보이려 한다거나 나이들어가는 것에 저항하기 보단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끔 화들짝 놀라곤 하는데 다 자연스런 과정이겠다.
곧 마흔인 나에겐 눈빛.이다.
눈빛의 살아있음.
눈빛은 분위기고 아우라다.
눈빛이 살아있는 섹시한 중년이 되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그것이 중년을 향하는 나에겐 생기와도 같은 것이다.
"나란 무엇인가?"란 질문도 결국 내 안으로 주의를 집중하는 과정에서 솟아나는, 피어오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