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경험해보지 않아서다. 서른 초반부터다. 죽음을 명확하기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우울이 밀려올 때마다, 불안과 두려움이 날 감쌀 때, 나는 "나는 죽어가고 있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를 생각하면 없던 것이 되어버리곤 했다. 효과 있었다. 죽음 앞에선 불안도 두려움도 내가 이미 가진 것과 내가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는 것, 갈망하는 것이란 실은 하등 소용없는 것이 된다. 의미 없는 것이다.
죽고 나면,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가져가는 게 있는가? 없다. 그러니 남과 비교하며 더 가지려 할 것도 자신을 비난하거나 자책할 것도 없다. 우리 모두는 각자 고유의 빛이 있다. 자기 만의 빛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 이 세상을 경험하면 되는 것이다. 알면서도 여전히 방황하고 아파하고 감정에 잠식되곤 한다. 참 쉽지 않다. 아무리 가볍게 살아보려해도 즐기면서 살려해도 불안과 두려움이 날 놓아주질 않는다. 내적 고요와 평화, 평온없이는 요원하다.
나는 성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내겐 외적 혹은 가진 것에 대한 성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성장이란, 내면의 들여다봄, 내면의 성찰, 직관적인 앎이다. 다행스럽게도 정말이지 감사하게도 아무리 질문해보아도 잡힐듯 잡히지 않았던 것들이 아주 조금씩 느낌적으로 직감적으로 선명해지고 있다.
파리살던 때, 폐장하기 직전 루브르 박물관에 들러 예술작품을 들여다보는 것이 매일 루틴이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또한 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싶다. 수많은 명작들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서 뚫어지게 응시하다 오곤 했는데, 무엇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미술이 무엇인지. 예술이 무엇인지. 질문하지도 않았다. 판단하지 않았다. 해석하지도 않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모든 만물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이 아니었을지. 그것은 인식이라는 관념 너머의 것을 들여다볼 줄 아는 통찰과 지혜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
불안과 두려움은 결국 내 안에서 오는 것이란 걸. 내 안의 집착이란 걸 알고 있다. 무언가를 꼭 가져야겠다.는 그 집착과 욕망이 역설적으로 그것이 내게서 달아나게 나게 한다는 것도.
부쩍 질문이 많아지고 다양해지고 깊어진다.
내 눈을 들여다본다. 내 눈동자는 어떤가?
깨어있는가?
알아차리고 있는가?
눈빛이 맑은가?
눈빛이 살아있는가?
빛나고 있는가?
세살 이전 아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를 지녀야 한다.
고요와 평온함이요 사랑이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니 감정에 매몰돼 이곳에서의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 흘려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감사하라.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자체가 행복이다.
행복은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일 뿐, 실체가 없다.
무형의 기분이고 그것은 늘 우리 곁에 살아 숨쉬고 있다.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하고 발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