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꿈을 꿨다. 어렴풋했지만 그 한 장면이 아침까지도 잔상에 남았다. 오전에 잠깐 산책하러 나가니, 이렇게 따뜻할수가. 바람결이 하나 차지 않았고 분명 겨울의 것이 이미 아니었다. 봄의 것이었다. 외투 없이 나가도 될 정도라니. 덥기까지 했다. 집으로 돌아와선 점심을 먹고선, "가만 있어보자. 외곽으로 드라이브겸 지금 이 날씨를 만끽하다 오자. 기분이 나아질거야. 그렇게 자연을 걸으며 다시금 비우고 오자."
즉흥적인 결정이었는데, 목적지를 절로 한 건, 머리를 식히거나 마음이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질 때면 방황할 때면 자주 찾는 드라이브길이 었어서다. 목적지를 정해놓으니 가기까지 그 과정을 온전히 즐기면 되는 것이고 목적지에 다다르면 평온한 광경이 나를 반긴다. 하면 기분 좋아지는 것 중 하나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한산하고 조용한 시골길, 외곽길로 드라이브하는 일, 동시에 알아차리는 과정, 생각과 감정을 놓아버리는 일...
외투도 챙기지 않고 가벼워진 차림에 미니 크로스백 하나만 메고선 출발했다. 창문도 살짝 열어젖히고 봄향기를 만끽했다. 아직은 봉우리가 피지 않은ㅡ 그러나 곧 만개할ㅡ 나무들이 마치 투명 우산이 되어주듯. "그래, 이거지. 이 길은 늘 내게 살아갈 에너지를 주는구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하니? 행복하니? 곧 완연한 봄이 올텐데 늘 그렇듯 이 봄을 정말이지 만끽해야 되지 않겠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늘 그렇듯 봄이 되면 무엇을 할 용기가 호랑이 기운 솟아나듯 나곤 하는데ㅡ 하마터면 잊을 뻔 했네. 이렇게 다시금 봄은 찾아오는데... 했다.
날이 좋아서인지 사람들로 더욱 북적였다. 북적이면 북적이는대로 나도 그 중 북적대는 사람 아닌가?. 그저 좋았다. 사람이 아무리 북적여도 내 안에서 집중하면, 내 안으로 집중하면 그 어떤 것도 문제될 게 없다. 북적이는 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나.만 보이게 되는 것이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그 어떤 것도 의식되지 않는 것이 된다.
시골길을 따라 걷는 그 길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본다. 자연스런 알아차림인데ㅡ 거창할 거 하나 없는 지금 여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주차장에서 느린걸음으로 십오분여 걷다보면 드넓은 절이 보인다.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과 인디 블루의 청명한 하늘과 절 기둥, 화려하게 채색되어진 기와와 사찰의 풍경이 이토록 조화를 이룬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마법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거대한 금동 미륵보살상 앞에 앉아 눈을 감는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마음을 진정한다. 주의를 호흡 그리고 내 안으로 돌린다. 어느 순간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신비스러운 것이 아닌 오롯이 내 안에 집중하고 있게 되면 절로 그리되는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스님의 목탁소리가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내 호흡과 조화를 이뤄가며 내 안으로의 주의를 더욱 수월하게 했다.
열린 왼쪽 문으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결이 옆 머리카락과 왈츠를 추는듯한, 꼭 그렇게 아주 부드럽게 살포시 내 왼쪽 뺨에 앉았다. 누군가 후.하고 입김을 부는 듯한. 평온하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 홀연히 있었다. 눈을 뜨니 이십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제서야 북적대는 인파가 보이고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계단에 올라 다른 길로 걷다 위에서 내려다 본 사찰의 풍경은 지금 이 순간, 그 자체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인데, 이토록 아름다운 나날인데,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인데, 시간인데,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이 그렇게 불안한가? 걱정되는가?... 오늘 이곳에 오길 참 잘했어. 순전히 내 안의 소리였다. 절로 향해 온 것이다. 노력하지 않았다. 내 안이 하는 소리는 이토록 분명한 행동, 실천이 된다.
그렇게 조금 걷다 다시 다른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에 미니 불상들과 동자상들을 만났다. 앙증맞고 귀여워 발걸음을 멈추곤 한참을 바라봤다. 조금만 더 걷다보면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석탑들이 쌓여있다. 어린아이와 부모가 작은 석탑을 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작은 돌들로 조심스럽게 정성껏 석탑을 쌓았다. 한 탑 한 탑 쌓을 때마다 나의 바람을 담았다.
혼자여도 외롭지 않았다. 혼자서도 이렇게 잘 놀아서야. 이렇게 즐거워서야. 혼자만의 시간 그 자체가 내겐 나의 안식처가 된다. 그 곳을 걷고 또 걸었다. 화창하고 따스한 날씨 덕분도 있고 정말이지 다 내 안에 있는데. 나는 무엇을 그렇게 기대했는지. 잔잔하게 여러 대화들이 오간다. 내 안에서 하는 말들. 알아차림을 알아차리게 되는ㅡ 다시금 생의 용기, 생의 에너지를 회복한다.
기분이 가라앉을 땐 기분이 나아질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몸을 움직여 환경을 바꾸거나 기분이 나아질, 내가 하면 기분좋아지는 것들을 시도한다. 몇 시간의 여행이랄까. 몇 시간의 나 자신과의 데이트는 이토록 성공적이다. 이 몇 시간으로 나는 오늘 하루 참 즐거웠다고 평온했다고 느끼게 된다. 몇 시간으로 하루를 통째로 사게 된다.
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걸으면서 생의 의지를 다지는 나 자신을 보면서 옅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헛웃음도 있었다. "나란 사람, 봄바람에 봄에 이토록 취약한 사람이란 말이지. 봄을 이토록 사랑하는데... 따스한 봄바람결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기분이 째지게 되는데, 앞으로 이 봄을 나는 몇 해나 보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니? 그러니 용기내! 까짓 거 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아봐!"
봄기운에 취해 있자니 이런 생각을 했다. "365일 내내 봄이라면, 봄날씨라면 나도, 우리는 조금은 더 평온할까? 조금은 더 힘을 낼까? 용기내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된다면야 나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그럴 수 있다면야 365일 내내 봄이었으면 좋겠다...!"
걷다보면 알게 된다. 몸을 움직이고 있구나. 나 지금 걷고 있네? 걷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게 된다. 내 몸이 나인가? 내 몸이 나라면 왜 나의 몸, 나의 손, 나의 다리라고 할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내가 가진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는가? 몸을 움직인다는 건,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이란 걸.
금동 미륵보살상 앞에서 문득 간밤의 꿈이 떠올랐다. "오늘 이곳에 오기 위해서였을까? 오늘 이곳에 들르기 위해서였구나..." 내가 꿈에서 본 장면은 내가 앉아 있는 이곳과 분명 흡사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
호흡하고 있다는 것.
나는 죽어가고 있다는 것.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
그러니 생각과 감정에 잠식 돼 이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말자는 것.
그냥 보지 말고 제대로 보자는 것.
내면의 확장이 곧 외연의 확장이라는 것.
눈을 감고 한 나와의 대화 말미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용서합니다."라는 말이 만트라처럼 내 안에서 울려 퍼졌다.
오후와는 다르게 이 밤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내린다.
창문을 연채로 두둑두둑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흠뻑 취한다.
낮엔 이토록 봄이었고 맑았고 화창했고 따뜻했다.
밤엔 이토록 비가 내린다.
삶도, 인생도 이런 거겠지.
꼭 날씨처럼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고.
날씨가 변하는 것일 뿐. 진짜.는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없다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가려져 있었던 것 뿐.
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란 걸.
Everything is ok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