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콩을 삶았다. 병아리콩을 자주 먹는 편인데 프렙엔 늘 병아리콩이 있다. 후무스해먹을 것도 따로 소분해놓고 나머지는 올리브유를 넣고 취향껏 간해 냉장고에 뒀다. 내 레시피엔 웬만해선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데, 설탕을 넣지 않아도 음식이란 충분히 맛있다는 것, 무엇보다 내 장이 편안하다.
이렇게 갖은 식재료를 프렙해놓고 나면 정말이지 넉넉한 기분이 든다. 내 안에서 만족하면 이것이야말로 부자가 아니고 무엇인가.싶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부엌에서 뚝딱뚝딱 프렙해놓고 모닝 커피도 마시고 옷가지도 개고 어느새 시간 순삭이다. 이런 부지런함이 이런 분주함이 때론 이토록 날 살아있게, 생의 의지가 샘솟게 할 수가 없다. 실은 이토록 작고 사소한 시시한 일상의 순간들과 나의 일과들이, 소일거리들이, 내 삶의 방울방울이 아닌가.
평범한 일상에서, 가급적 평온하게 평안하게 편안하게 고요하게 즐겁게 생기있게 내 기분을 관리한다는 건 실은 결심하는 것이다. 요즘 부쩍 기분 관리.를 생각하게 되는데, 기분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내 기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실은 기운이 다 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데, 내가 진짜 신경써야할 것은 기운.인 것이다.
어느 날은 유난히도 기분이 가라앉을 때가 있다. 괜시리 미래를 생각하며 불안해지고 괜시리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후회들로 생각에 빠진다거나 하는 것들... 지금은 그렇다한들 즉각 알아차리게 되는데, 그럴 때 내가 하는 일이란ㅡ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챙겨 카페에 간다든지, 산책을 한다든지, 장보러 간다든지, 요리한다든지, 일본의 잔잔한 영화라든지, 블루 발렌타인, 이터널 선샤인 같은 영화를 틀어놓는다든지... 이런 방식으로 그 기분에 침잠하지 않으려, 깊이 다이브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고나면 희한하리만치 어둠이, 불안과 두려움이, 우울이 걷힌다. "아, 감정이란 내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불과하구나. 이렇게 사라지는 것을. 고정된 것이 아니구나. 모든 것은 변하는구나. 그러니 생각에 감정에 잠식되는 건 안될 말이구나. 고정불변한 것은 없구나. 감정과 생각은 내가 아니구나..." 동시에 알아차려지면서 잔뜩 흐렸던 내 기분이 다시금 맑아진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늘 한결 같은데, 어쩌면 기분을 관리하는 일이란, 행복감을 느끼는 일이란, 즐거움을 발견하는 일이란 실은 별 거 아닌데... 내가 결심하면 되는 것인데...한다.
나이 들어가며 좋은 점은, 인생에 크게 어떤 의미가 있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는 것과 인생 그리 심각할 거 없다는 마음이 든다는 점이다. 가볍게 툭.하게 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도 있고 까짓 거 뭐.싶은 이십대와는 다른 호기로움도 생긴다. 살면 얼마나 살까.싶은 것도 있다. 내 삶이 이토록 소중한 이유는 삶의 결정성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결심하고 내가 책임지는 것. 그것이 인생이었다.
기대하지 않는 것.이 이토록 날 자유롭게 한다는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인간관계에서도 일에서도 이토록 유리하다는 것도.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설명할 것이 없다는 것도. 가령 내 결심에, 내 결정에 그 어떤 변명도 그 어떤 설명도 필요없는 것이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도 없어진다. 그저 나 자신으로 내 안에서 만족하는 삶이 날 더욱 평온하고 고요하게 한다는 걸 알게 된 덕분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혼자만의 고독을 마음 껏 유영할 수 있는 것도 결국 나.를 구할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것, 내 눈물을 내 손등으로 닦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고독할 줄 아는 건, 고독의 즐거움을 안다는 건 자기 안에서 마음껏 유영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나는 알게 되었다.
어차피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결심해야 한다. 이왕이면 즐겁게 생기있게 나 자신이 기분좋아지는 일을 소소하게 사소하게 시시하게 해나가면서 그 안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 오유지족의 삶이 사는데 전적으로 유리한 부분이 있다.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마음이 날 더 자유롭게 한다.
언젠가 분명 건너가게 될텐데 뭐 그리 집착할 게 있을까? 뭐 그리 두려워하고 불안할 게 있는가?하는 생각이 있다. 그냥 좀 즐길 순 없는걸까? 정말이지 이 세상이, 이 현실이 재미있는 놀이, 피크닉이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실은 나 자신에게 곧잘 하는 말인데, 지금 껏 살아보니 내가 지레짐작 미리 했던 갖은 걱정들은 실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불안.이라는 실체없는 것을 있다고 믿으며 그 안에 갇혀 이토록 힘겨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지만, 그 잃음이 그 헤맴도 그 어떤 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걸 안다. 병아리콩을 삶다가 넉넉한 마음이 들었고 소파에 앉아 모닝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자니 절로 사색되는 것. 삶이란 실은 이토록 자연스러운 것이다. 절로 펼쳐지는 것이다.
바싹 잘 말려진 옷가지들을 개다 포개진 옷가지 하나를 내 뺨에 살짝 대본다. 약간의 향기와 그 바싹함과 온기. 피부와의 접촉. 그 어느 것 하나 조화롭지 않은 것이 없다.
남과의 비교가 줄었다. 희한하리만치 남과 나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이젠 들지 않는다. 나는 나.라는 생각.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마음과 나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 내 안에서 만족하니, 만족할 줄 아니 지금 내가 가지지 못한 것보다 내가 가진 것에 이토록 감사하게 되는 마법이다.
모든 것에 감사하니, 감사한 일들만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