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지와 찰리 Sep 24. 2020

[균형을 찾아서]언택트 시대, 생애 첫 10km 마라톤

작은 성취로 자존감 관리하기

글 | 미지


일요일 오후 낮잠을 자려다 스케줄 어플에서 보내온 알람에 눈을 번쩍 떴다. 


‘언택트 마라톤 기간’ 종료일.


맞다, 나 마라톤 한다고 했었지.

못 본척하고 내년에 다시 도전할까. 오늘따라 베개가 무척 푹신해 보여. 눈을 깊게 감았다 뜨는데 오직 마라톤을 위해 구입한 2만 원짜리 티셔츠가 아른거린다.  

그래, 일단 나가보자.

오후 햇볕 아래 누워있는 푹신한 베개를 뒤로 하고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나의 생애 첫 마라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스케줄 어플에 이 무모한 일정을 적은 날로 돌아가 보자. 선선한 바람과 함께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하고 있던 몇 가지 일들에 깊은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기, 자소서 쓰기, 공인영어시험 준비... 무엇보다 체력 증진을 위해 2월부터 해온 달리기가 무척이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또 길고 길었던 장마로 인해 한 달 동안 달리기를 쉬게 되자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식은 열정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방법, 어디 없을까.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법한 것들이 갑자기 없던 존재감을 나타낼 때가 있다. 편의점에서만 판매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GS25를 찾았다. 입구 앞에 언택트 마라톤을 개최한다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2020 Great Son UNTACT RUN.” 광복 75주년을 기념해 손기정 선수의 정신과 의지를 기리고자 개최된 언택트 마라톤을 홍보하는 포스터였다. 가끔 타이밍 좋게 기회들이 찾아오는 게 참 신기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마라톤은 참가비를 내면 손기정 선수의 모습이 담긴 티셔츠와 번호표, 메달 패키지를 보내준다고 한다. 그의 의지에 비하면 나의 의지는 한없이 연약하고 하찮지만, 마라톤은 이미 식어 사라진 열정을 되살릴 불씨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티셔츠가 놓치기 싫을 만큼 멋스러웠다.   



D-30 :: 벼락치기에 약한 타입

언택트 마라톤에 지원하고 급하게 연습을 시작했다. 한 달을 쉬고 다시 달리려니 몸은 더 무거워지고 정신은 갖은 핑계를 대며 밖에 나가기를 거부했다. 참가비를 냈으니 하는 척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일주일에 딱 세 번 30분간 달렸다. 사실 막냇동생이 반찬 투정하듯 깨작깨작 뛰다가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했다. 지금 지쳐있다면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말이 떠올라 주말에는 달리기 대신 엄마와 등산을 갔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다리를 튼튼하게 만들어야 10km를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2월부터 장마 전까지 뛰면서 길러온 체력이 있어서 왕복 3시간 등산 코스가 힘들진 않았다.


생애 첫 마라톤 도전, 이제야 실감이 난다.


D-10 :: 'Great Son 티셔츠' 도착

별생각 없이 SNS 피드를 넘기고 있다가 Great Son 티셔츠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때부터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마라톤을 한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디데이 10일을 남겨두고 평일에만 3km씩 달렸다. 길면 38분, 짧으면 30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 이 기록을 유지한다면 10km는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이내의 기록이 나올 것이다. 굳이 뛰지 않고 빠르게 걸어도 이 정도는 나오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도 없었지만 기록에 대한 욕심이 깨끗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참가에 의미를 두자.    


D-DAY :: 페이스 메이커를 고용했다

언택트 마라톤 일정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앞서 말한 대로 아침에 아르바이트를 다녀온 뒤 낮잠을 자려다 스케줄 알람 덕에 정신을 차렸다. 옷을 갈아입고 몸을 풀었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도중에 포기해버리면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부담감과 긴장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도저히 혼자서는 완주할 수 없을 것 같아 집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엄마를 페이스 메이커로 고용했다. 다음번 화장실 청소를 내가 한다는 조건으로. 

오후 5시. 물과 땀 닦을 수건만 챙겨 밖으로 나왔다. 코스는 하천을 따라 5km를 달린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왕복 10km 일정이다. 고맙게도 자전거를 탄 엄마가 앞서 달리면서 페이스를 맞춰 줄 것이다. 

자, 뭐가 됐든 해보자. 목표는 완주다.     

   

준비물

샤오미 미밴드 + 미밴드 어플(GPS 기반 러닝 어플) – 정확한 측정을 위해 핸드폰을 손에 쥐고 달렸다 

얼음물

손수건


1km ~ 3km 

느낌이 좋다. 해볼 만 한데?

3km를 쉬지 않고 달렸다. 기록은 19분. 평균 페이스 6분 33초/1km가 나왔다. 평소 뛰던 속도보다 더 빨리 달린 것이다. 페이스 메이커의 효과인가? 이 정도 속도와 체력이라면 해볼 만하다.

*3km 지점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30초 정도 멈췄음.


5km

그분이 오셨다, 첫 고비.

5km 지점에서 고비가 왔다. 지는 해를 마주하고 달려서 그런지 땀이 멈추질 않았다. 4km가 넘어가면서부터는 머리도 살짝 아팠다. 생각해보니 연습할 때는 항상 밤에만 달리고 낮에는 달리기를 해본 적 없었다. 뛰고 걷기를 반복하니 평균 페이스가 10분이 넘어갔고 곧바로 미밴드는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진동을 울려댔다.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다행인건 마스크 덕분에 앞뒷사람은 못 들은 것 같다. 아직 반 밖에 못 왔는데 남은 5km를 어떻게 뛰지…?

*5km 600m 지점에서 물을 마시고 2분 정도 쉬었다.    


샤오미 미밴드. 평균 페이스가 10분을 넘기면 알람과 진동이 울리도록 설정해 두었다.


7km ~ 9km

아이 캔 띵크 애니띵.

말 그대로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뇌가 사고를 멈춘 느낌이다. 하지만 다리는 계속 달리고 있다. 초등학생 때 텀블링 위에서 신나게 놀다가 땅에 내려왔을 때 느낌과 비슷했다. 이내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숨이 가빠왔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아 가벼운 절망감 마저 느껴졌다. 이 다음부턴 땅만 보고 달렸다.

*6km 지점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30초간 멈춰 있었다. 


마지막 1km

젖 먹던 힘까지

1000m…700m…500m…300m... 100m… 마지막 남은 1km가 지독하리 만큼 힘들었다. 수시로 남은 거리를 확인했다. 속도가 점점 더 느려졌다. 페이스 조절을 실패한 것이다. 여기서 멈추면 계속 걸을 것 같아서 이 악물고 달렸다. 페이스 메이커가 저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거침 숨을 몰아쉬며 조금만… 더…라고 생각했을 때 미밴드에서 10km를 알리는 진동이 울렸다. 드디어 끝이다…!



10km 완주

한 번도 뛰어본 적 없고, 절대 못할 것 같았던 10km 마라톤을 완주했다. 기록은 1시간 10분. 평균 페이스 7분 1초. 페이스 메이커로 활동해준 엄마의 반응은 놀라움 반 의심 반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기록이 나왔으니 나조차도 믿기 힘들었다.


달릴 때는 해가 떠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달이 보였다. 길고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땀에 젖은 티셔츠가 살에 닿아 조금 춥기까지 했다. 이제 이 티셔츠를 보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구나. 퇴사를 하고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5분도 못 가서 헛구역질을 했는데 지금은 1시간 10분 동안 10km를 달릴 수 있다. 지속의 힘은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10km, 1시간 10분. 마라톤 고수들이 보면 코웃음을 지을 이 기록은 그동안 꾸준히 달려온 내 노력을 증명하는 숫자가 됐다. 성취감에서 오는 자존감이 얼마나 큰 삶의 원동력이 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줬다. 


자존감이란 게 참 예민하다. 어떤 날은 친구가 생각 없이 뱉은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다가도 또 어떤 날은 계란 후라이만 잘 구워져도 자존감이 하늘을 찌른다. 결국 자존감을 올리고 내리는 건 본인 몫이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자존감은 나를 둘러싼 주변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남과 비교하며 자존감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는 일 만큼 힘든 일도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작은 목표를 세운다. 목표를 이루고 돌아오는 성취감을 맛보면 자존감은 올라가게 돼 있다. 엉겁결에 시작한 마라톤이 자존감을 높여준 것 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이고, 취업 문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남과 비교하며 내 자존감을 조각내고,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사실보다 비어 가는 통장을 보며 더 큰 조바심을 느낄 때 오늘을 기억해야겠다. 마라톤까지 했는데, 뭐가 문제야 baby?                     



✅마라톤 비기너들을 위한 실전 tip.

팔을 너무 세게 흔들지마라 – 속도는 빨라질지 모르겠지만 체력 소모가 더하다. 팔을 직각으로 굽힌 다음 가볍게 흔들어라.

달리기 전 과식하지마라 –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점심에 삼겹살과 밥을 잔뜩 먹었다. 배고픈 상태에서 뛰는 것도 안 좋지만 위에 음식물이 가득 차 있을 때 뛰는 건 더더욱 좋지 않다. 달리던 도중 삼겹살이 다시 입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마라톤 당일에는 적당히 먹자.   

초콜릿 안 챙겨도 된다(물 하나만 챙겨라) – 초콜릿 먹을 여유 없다. 목을 축일 물만 있으면 된다.


작가의 이전글 [1인칭주인공시점]생활형 빌런 '느그 동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