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다.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왔다. 열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몰려온 두통이 더 심해지고 있다. 급기야 속까지 메스꺼워지면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이 울렁거렸다. 같이 온 기형이를 두고 열차 사이에 연결통로로 나갔다. 확실히 객실보다 공기가 차가웠지만 오히려 속은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열차 통로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화장실 문을 옆으로 제치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세면대를 잡고 한참을 버티고 있었다. 몇 분 정도 그렇게 열차의 덜컹거림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가 물을 틀고 세수했다. 확실히 속이 괜찮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아직 객실 안으로 가지는 못할 것 같아서 잠시 이곳에 있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간이의자가 하나 있어서 잠깐 앉아서 쉬기로 했다. 잠시 의자에 앉아 왼쪽에 달린 창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열차가 가는 방향과 역방향에 앉아 있던 나는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주 빠르게 거꾸로 지나치고 있었다.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을 탄 건가?'
그랬다. 나는 지금 과거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잃어버린 과거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며칠 전부터 오늘을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했다. 어떤 오늘은 내 안에 쌓아 두었던 모든 게 해소되어 자유로워질 때도 있었고 또 어떤 오늘은 과거의 그림자가 나를 집어삼키기도 했다. 그렇게 수천번 오늘을 그렸다 지웠다.
오늘의 결말.
시간이 멈춘 듯 한동안 멍하니 창문 밖 스치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한쪽 뺨에 뜨거움이 느껴졌다. 또 시작이다. 집을 나선 후부터 열차에 오를 때까지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내기를 반복했다. 아무렇지 않다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참으려 애를 쓸수록 더 크게 터져 나왔다. 용산역까지 오는 지하철에서는 아예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몇 정거장을 흐느꼈다. 힐끗 거리는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분노와 두려움, 슬픔까지
모든 감정이 뒤섞여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이제 곧 나는 그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강제로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열세 살의 나를 만날 것이다.
"치~~~~"
어느덧 열차가 강릉역에 멈춰 섰다. 기형이와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나 혼자 간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기형이는 무조건 오늘은 같이 가주겠다며 나를 따라붙었다. 나의 오늘을 관찰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싫었지만 기형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오늘을 기억해 주는 누군가 있다는 게 안심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강릉역을 나와 신호등을 건너 조금은 넓은 길로 걸어갔다. 길 양 옆으로는 오래된 여인숙이 줄지어 있었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낡은 건물은 어렸을 때 살던 우리 동네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순간 나는 마치 열세 살의 나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늘에 딱 어울리는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길을 따라 얼마 더 들어가니 열차에서 기형이가 예약한 모텔이 보였다. 이런 곳에 무슨 예약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단오축제 기간이라서 웬만한 모텔은 예약이 꽉 차 있었다. 다행히 기형이가 예약이 취소된 방 하나를 잡은 게 행운이었을 정도였다. 2층에 있는 방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방문을 열어 7평 남짓한 방안에 가방을 풀었다. 기형이는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로 가 손을 씻고는 침대에 대자로 누었다. 나는 그런 기형이를 보고 말했다.
"나 갔다 올게."
"응,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충분히 얘기하고 와. 나는 오랜만에 TV도 보고 푹 쉬고 있을 거니깐."
"고마워..."
기형이를 두고 혼자 나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상하게 온 길보다 가는 길이 더 길게 느껴졌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뒤섞여 나를 굳어 버리게 했다. 천천히 강릉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날씨는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내일 듯 먹구름이 하늘을 여전히 가리고 있었고 공기는 서늘했다.
멀리서 그가 보인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온몸으로 느껴진다고 하는 게 맞을까.
어려서부터 유난히 시력이 좋았지만 지금 그를 알아보는 건 내 눈이 아니라 내 안에 모든 감각이다. 아침에 내린 비는 공기 중에 습기를 머금게 했고 그 미세한 물방울이 그의 움직임을 진동으로 바꿔 나에게 전달하는 듯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고 싶었다.
오늘 그를 만나기로 결정하고 주변 사람들은 응원보다 걱정을 더 많이 했다. 만나서 좋을 게 없다는 사람도 있었고 자유를 얻는 게 아니라 다시 과거에 구속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삶은 누구의 선택도 아닌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어야 하기에 나는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를 위한 결정이 아니었던가.’
점점 더 강릉역이 가까워졌다. 이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그를 만난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이 먹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날씨도 내 마음도 스산했다.
횡단보도 반대편 광장에 우산도 없이 혼자 서 있는 그는 누가 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 쪽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안 좋은 눈을 작게 만들어 더 선명히 보려 애쓰는 모양이다. 그가 나를 찾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천천히 횡단보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이제 약 20미터 앞에 그가 있다. 걸어서 1분도 채 안 되는 이 거리를 난 왜 이렇게 오래 걸렀을까?
"은성이냐?..."
"네…."
그가 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나도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잡았다. 주름이 깊게 팬 그의 손이 내 손을 잠시 꽉 잡았다 놓았다. 며칠을 이 순간만 상상했다. 그런데 좀처럼 처음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어떻게 걷고 어떻게 표정을 지어야 하고 어떻게 첫마디를 건네야 할지 수 없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지만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었다. 어설프게 악수를 하고 나니 그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마스크 위로 부은 눈과 처진 눈 밑 살이 보였고 가늘고 힘없는 머리카락에 듬성듬성 두피가 보였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 전체를 못 봤지만, 그가 지내온 세월이 보였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과는 너무 달랐지만,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순간 궁금했다.
'나도 늙으면 저런 모습일까?'
그렇게 우리는 짧은 악수를 하고 길을 건너기 위해 다시 횡단보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와 나란히 걸어 본 게 얼마 만인가?
31년 전 나의 국민학교 졸업식 이후로 처음이었다.